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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컬럼

스포츠와 권력 : 김운용, 그 이후

by 태권마루 2008. 5. 5.

Ⅰ. 서론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기계화·자동화된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신체활동에 의한 건강한 삶을 외면 당한 채 각종 스트레스와 질병에 노출되고 있다. 이렇듯 현대사회에서의 만연된 질병을 해소하기 위한 방책으로 세계 각국은 스포츠와 여가를 통하여 건강한 신체활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정책적으로 이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이러한 스포츠는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유지·발달시켜주는 기능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국가간의 화해와 교류의 역할을 수행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체육·스포츠의 문화적 기능으로서 정치적 수단은 사회라는 범주 안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homo politicus)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며,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인간은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고, 이를 통해 일정한 형태의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인간사회에서 정치권력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양재근·김우성, 2001).
과거 프로레타리아 예술이 계급투쟁의 무기가 되었고, 중세철학이 신학의 노예(Philosophiae ancilla Theologiae)로서 귀속되었으며, 마르크스주의 예술관이 정치의 노예가 되었던 바가 있었으나 체육·스포츠가 실질적인 정치권력의 도구가 되었던 사례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부터는 독일과 소련 등의 국가에서는 전체주의를 선전하기 위하여 올림픽을 이용하였으며, 이러한 동기가 근대에 이르면서 스포츠 상황에서도 정치적·종교적·인종적 문제 등이 야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스포츠가 정치적 도구로서 관계를 맺고 이용된 사례가 있으며, 이것은 국가 차원의 순기능적인 측면과 함께 스포츠의 역기능적인 측면이 표출되고 있다.

스포츠의 정치적 기능면에서 순기능적인 측면은 국민화합에 그 가치를 둘 수 있다. 국가나 민족주의자들은 자국민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체조 보급 운동이나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를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상징물로 동일화시킴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민족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정동성, 1998). 이러한 사례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1971년 태권도의 국기화(國技化)와 1971년 박스컵(대통령배 축구대회),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경기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스포츠는 외교적 수단으로 국가간의 교류증진에 기여한다. 이는 1971년 중국과 미국의 핑퐁외교를 시작으로 하여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과 같이 스포츠 교류는 국가간 교류의 커다란 동기가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도 멸공의 구호아래 남과 북이 대치되어있던 1972년에 7.4 공동성명으로 대화의 무드가 조성되었으나, 1976년 도끼 만행사건으로 인해 다시 대화가 단절되었고, 이후 1991년 남북 청소년 축구 단일팀 구성 및 남북 탁구 단일팀 구성, 1999년 남북 농구교류,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남과 북은 다시 화해의 장이 조성되었다. 특히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남북 동시입장은 스포츠의 정치적 순기능을 대표할만한 사건들이며, 스포츠를 통하여 향후 우리나라의 통일기반을 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포츠는 이러한 기능 외에도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그 나라의 경제와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역할은 체육·스포츠의 지도자들이 한몫을 더해주고 있는 것이 기정 사실이다. 우리 나라에서 체육인이라고 하면, 그저 먹고 운동이나 하는 혹은 공부가 안되어서 몸으로 행하는 직업인으로 평가된 고정관념의 테두리를 벗어 난지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스포츠의 정치적 기능이 운동문화의 기능으로서 커다란 자리를 차지해 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직 사실로 판명된 사항은 아니지만, 최근 김운용의 사건 내용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 체육계에 커다란 충격과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현재 IOC 부위원장으로 재직 중인 그는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 국제경기연맹(GAISF) 회장, 국기원 원장 그리고 국회위원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5개의 국민훈장과 해외에서 9개의 외교 훈장과 함께, 세계 스포츠계에서 영향력 있는 2번째 사람인 동시에 전세계 5대 스포츠 정치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김운용의 정치적 영향력은 각종 국제경기 및 올림픽경기 유치, 그리고 남북체육교류 외에도 한국의 이미지를 세계에 알리고, 우리나라를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을 만드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그는 2001년 IOC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기 직전 의류업체로부터 거액수수(동아일보, 2004년 1월 28일),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부정사건으로 인터폴에 체포된 아들을 구명하기 위해 외교부가 고위 당국자를 파견하려다 취소한 사건(동아일보, 2003년 7월 7일), IOC 부위원장직을 위한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 방해설 등 지속적인 여파가 이어지던 중, 2004년 1월 28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배임수재, 외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되는 불명예를 안고 자신에게 오점을 남기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더욱이 주요 외신들이 'Powerful'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큼 국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김운용은 그 동안 국익을 도모하는 창구 역할을 하면서도 때로는 사익을 앞세운다는 의혹(동아일보, 2004년 2월 6일)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건 등으로 인하여 그 동안 쌓아온 한국 스포츠계의 위상이 실추되었으며, 대외 스포츠 영향력의 저하, 그리고 개인의 명예훼손에까지 이어졌으며, 이같은 사례들은 국제적 스포츠 인사로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주는 사건이었다. 이렇듯 김운용 한사람의 사건이 국회, 문화관광부, 외교부, 대한체육회, 세계태권도연맹, 국기원 등 한국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여파를 남기게 되었다. 또한 김운용 파문은 스포츠로 인해 획득된 권력, 즉 스포츠와 권력의 실체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스포츠의 사회적 기능의 역기능적 면을 단편적인 부분이 노출되는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김운용은 전세계에 우리나라 스포츠 위상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우리나라 역사상 세계적인 정치능력자로 평가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이미 체육계에서는 김운용의 외교 능력을 이어받을 만한 후계자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으며, 후계 구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팽배해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우리나라 체육계의 입지전적인 인물로, 그리고 세계 스포츠계의 실력자로 평가되고 있는 김운용 개인의 실체를 파악하고, 모든 사건의 결과에 따라 나타날 김운용 은퇴 이후의 체육·스포츠계의 문제점과 우리나라 체육·스포츠를 대변할 수 있는, 세계속에 내어놓을 만한 능력자를 양성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탐색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스포츠와 정치권력의 관계

Greiner & Shein(1988)은 권력을 "자신의 아이디어나 계획을 다른 사람이나 집단으로 하여금 수용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하였으며, Gordon(1990)은 "다른 사람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잠재적 또는 실제적 능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 박내회(1991)는 권력이란 정치권력을 의미하는 말로만 사용되어 부정적인 관점으로만 사용되고 있으나, 조직을 설명·예측하고 통제함에 있어서 합리적인 내용들만 가지고는 안 되는 부분이 있고, 이러한 부분들이 권력의 연구에 의해서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 권력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학술적인 용어로서 권력이란 "개인 및 집단 상호간에 행사되는 모든 종류의 영향력"을 의미하며, 조직 내에서 권력은 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수단의 하나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조성주, 1996). 즉 권력은 선천적인 능력이 될 수 있으며, 후천적인 능력이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사항이 개인의 능력이라고 인지될 수 있으며, 더욱이 권력에 대하여 힘을 유지하는 데에는 또 다른 조건이 필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Hersey & Blanchard(1993)는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로 권력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 보상적 권력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상을 제공할 수 있는 리더의 능력에 기반을 둔 권력을 의미하며, 칭찬, 휴식, 휴가 등 정적인 유인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을 때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둘째, 강압적 권력으로서 공포에 기반을 둔 권력이다. 강압적 권력을 많이 사용하는 리더는 아랫사람이 복종하는 것에 대하여 복종하지 않으면 고통스런 과업할당, 징계, 구타 등의 처벌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셋째, 합법적 권력이다. 합법적 권력은 그 리더가 보유하고 있는 지위에 기반을 둔 권력이다. 일반적으로 지위가 높을수록 합법적 권력은 그 만큼 더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합법적 권력이 높은 리더가 다른 사람의 복종을 끌어내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조직에서 리더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 리더의 제의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넷째, 준거적 권력이다. 준거적 권력은 리더의 개인적인 성격특성에 기반을 둔 권력이다. 준거적 권력이 높은 리더는 그의 성격특성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고 존경을 받는다. 이 같은 리더에 대한 호감, 존경 및 동일시 기대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지막으로 전문적 권력이다. 전문적 권력은 리더가 가지고 있는 전문성, 기술 및 지식에 기반을 둔 권력이다. 이 같은 전문성이나 기술 및 지식은 존경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전문적 권력이 높은 리더는 다른 사람의 작업수행 행동을 조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존경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포츠에서의 전문지식, 정치능력, 화술, 언어 등에 관한 전문적 지식은 국제교류에서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전문적 권력이라 하겠다.

이러한 권력 외에도 스포츠에 내포되어 있는 정치권력의 속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스포츠 참여자는 학교, 직장, 지역사회, 국가 등과 같은 특정 사회조직을 대표하며, 그 조직에 대한 강한 충성심을 지니고 있다. 특히 올림픽 경기나 국제 경기에서 승리는 자국의 우월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포츠는 한나라의 정치·경제체제 및 문화적 우월성을 표출하여 주는 수단이다.

둘째, 스포츠와 정치권력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조직의 속성 자체에 존재한다. 예를 들면, 선수와 구단간(프로야구 선수협의회와 각 구단), 경쟁 리그간(남자와 여자, 프로야구 대 프로축구 등), 혹은 다양한 행정기구(대학야구연맹 대 프로야구 위원회 등)간에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는 현상이다.

셋째, 정부기관의 개입이다. 예를 들면, 기업체가 스포츠 관련조직을 운영할 경우 조세감면 특혜를 중심으로 의도적으로 정경유착의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라 볼 수 있다(양재근·김우성, 2001).

고대 그리스 시대의 경우, 국가는 전쟁에 대비한 시민의 체력향상과 더불어 다른 국가에 대한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신체단련을 이용하였으며, 당시에도 도시국가의 위상을 높여 준 훌륭한 운동선수들에게는 많은 특혜를 부여하였다. 특히 로마제국 초기에도 체육활동은 군대의 체력훈련에 이용되었으며, 후반기에는 지배계층을 위한 오락성 및 대중들을 통제할 정치적 목적으로 체육을 이용하였다.
또한 근대 올림픽 운동이 시작되던 시기부터 올림픽 대회와 정치와의 관계는 불가피 하였다. 1896년 아테네 올림픽 대회에서 3개 국가들이 올림픽 대회를 특수한 목적으로 이용하고자 시도하였다. 즉 그리스는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대회를 아테네에서 계속하기를 희망하였고, 독일은 그 대회를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였으며, 프랑스는 독일에 대하여 상호주의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화를 시도한 나라들의 수는 근대 올림픽 대회 참여국가들의 수에 비해 별로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이한혁, 1993). 현대에 이르러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대회에서도 미국 등 서구권의 올림픽 참여 거부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었으며, 차기 LA 올림픽 또한 소련 외 동구권국가들의 불참이 정치적 맞대응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의 정치권력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스포츠를 통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스포츠가 지니고 있는 내재적 특성인 경쟁성, 공개성, 협동성, 비언어적 전달성을 이용하여 그 영향력을 더욱 확대해 나아가고 있다(정동성, 1998).

현재 스포츠 세계에서 최대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위치는 바로 IOC라고 할 수 있으며, 어느 국가를 방문하든 최고의 대우와 특혜를 받는 자리이다. 이러한 IOC 위원의 선출은 위원장의 추천에 의해 집행위원회를 거쳐 총회에서 선출된다. 즉 IOC 위원은 IOC(국제올림픽위원회)를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또한, IOC 헌장은 IOC 위원이 모든 정치적·금전적인 압력으로부터 독립해서 행동하는 것을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IOC 위원이 IOC를 대표한다고는 해도 그 사람들 역시 하나의 국가에 소속된 국민이므로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더욱이 IOC 헌장은 각 위원에 대해서 '상당한 지위, 고결한 품성과 바른 판단력, 실천력을 갖고 있으면서 올림픽 정신이 투철한 인사이어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돈이나 권력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진정한 IOC 위원의 지위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IOC 위원들은 재벌도 있고 왕족들도 있으며, 장관, 수상도 있다. 왕족 중에서는 영국의 앤 공주, 룩셈부르크 국왕, 모나코의 알버트 황태자, 네덜란드의 오렌지 왕자, 그리스의 콘스탄틴 국왕 등이 있으며 수상급의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IOC 위원들에 대해 올림픽 귀족들이라며 비난의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명예직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소리를 듣는 이유는 IOC 위원들이 향유하고 있는 여러 가지 특권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전세계 어디든지 비자 없이 출입국이 가능하며, 호텔에 숙박을 할 때에는 그 나라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원수 또는 수상급의 대우를 받는 것 등이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더욱이 IOC 위원들 상당수가 자국으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도 포함이 되는 것이다.

1896년 시작된 근대올림픽운동은 스포츠에 의한 인간 완성과 스포츠 교환을 통한 국제평화 증진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84년 LA 올림픽 이후부터 시작된 상업주의의 범람으로 올림픽의 고귀한 정신이 오염되기 시작했다.
올림픽 상업화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현 IOC위원장 체제 출범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그 같은 사태의 책임소재가 어디에 있는가를 말해준다. 세계적인 갑부 순위에 올라있는 사마란치 위원장은 IOC의 빈 금고를 채운 데에는 공을 세웠을지 몰라도 올림픽 기본정신에는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올림픽은 최고의 기능수준을 가져야 한다'며, 아마츄어리즘의 근원지인 올림픽에 프로 스포츠의 참가가 허락된 사안은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또한 올림픽의 경제적 가치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TV 중계료와 광고료 수입은 천문학적 숫자며, 개최지가 얻는 경제효과 역시 엄청난 것이다. 올림픽이 이처럼 올림픽이 황금 알을 낳는 국가 차원의 비즈니스가 되자 IOC는 이권다툼의 장처럼 되고 말았으며, IOC위원 가운데는 '올림픽정신의 세계 전파'라는 본래 임무는 망각한 채 개최지 선정에 자신이 던질 표(票)를 금전으로 환산하는 금권주의의 장이 되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스포츠계의 권력자로 알려진 김운용이 국제 스포츠계 거물로 성장한 배경에는 국제경기단체총연합회와 세계태권도연맹의 배경과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의 후원이 바탕을 이룬다. 김운용은 96개의 경기단체로 구성된 국제경기단체총연합회를 8년간 이끌고 있으며, 30여년간 맡아온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자리도 국제적 위치를 굳히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세계 173개 회원국을 보유한 세계태권도연맹의 부회장, 일반위원, 자문위원 가운데는 IOC 위원이 12명이나 된다. 따라서 김운용은 두 단체의 장악을 통해 최소한 36명의 IOC위원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태권도가 내포하고 있는 권력은 세계 각국의 태권도 단증 발급에 대한 행정에서 표출되고 있다. WTF (World Taekwondo Federation)와 국기원은 전세계 태권도 단증 발급의 모든 행정처리 업무가 진행되어 진다.
더욱이 국기원장의 명의가 없는 태권도 단증을 보유한 자는 각종 국내 및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가 없다. 특히 173개의 태권도 가맹국은 단증 발급에 대한 발급권이 없으므로 최종심사기관인 국기원에서 단증을 발급한다. 또한 각 나라의 심사권은 그 나라 협회장의 수락이 있어야만 되는데, 각국의 협회장이나 실권자의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또 다른 태권도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태권도 단증에 대한 행정체계는 사실상 김운용 개인의 권위를 나타내며, 세계 각국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2. 김운용의 생애와 태권도

김운용은 1931년 대구에서 조선민보사 기자로 근무하던 김도학의 아들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릴레이, 스모와 같은 운동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으며, 중학교 때에는 복싱, 유도, 스케이트, 육상, 가라데 등 여러 가지 종목을 배웠고, 학예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할만큼의 예능도 지니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까지 성적이 우수하였고, 특히 영어에서만큼은 자신이 있었고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피부색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외국인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자체가 즐거웠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에 그는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학교에 자주 들려서 미군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밤늦은 시간대에도 미군들을 만나러 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계기로 영어시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영어교육의 기초적인 길 안내인이 되어준 은사는 외교관 홍재익으로서 당시 그는 김운용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장래희망인 외교관의 꿈을 키워나가는 동기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1949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외교관으로서의 준비를 해나갔다.

그러나 그의 꿈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무산되고, 보병학교에서 보병장교로 복무하던 중 미국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후 1958년 고국으로 돌아와 이화여자대학교 피아노학과를 졸업한 박동숙씨와 결혼하였으며, 같은 해 연세대학교에 학사편입을 하여, 동 대학원 석·박사과정을 모두 마쳤다. 이후 김운용은 5·16 구테타가 일어나자 육군 중령으로 제대하게 되었다.

그러던 김운용이 세계 스포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탁월한 그의 어학능력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주미 대사관 참사관으로 지냈으며, 그 후 UN대표 참사관과 제20차 UN총회 한국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1971년에는 당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돌연 본국으로 불려와 청와대 경호실 보좌관을 거쳐 학술원장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이때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직을 추대 받아 제7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그는 태권도와 한국스포츠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1972년 국기원이 건립되었으며, 또한 태권도를 세계인의 스포츠로 만들기 위해서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하여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여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1975년 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GAISF)에서 일본의 가라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태권도가 국제적인 공인을 받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운용은 1986년 10월 19일 LA에서 열린 제91차 국제올림픽위원회총회에서 한국인으로는 6번째로 IOC 위원에 선출되었고, 1988년에는 임기 4년의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는데 이는 2년이라는 최단기간에 집행위원이 된 최초의 위원이기도 하였다. 그는 "2001년 1월 현재 IOC 회원국은 199개국이며, 이들을 대표하는 IOC 위원은 124명뿐이다. 즉 회원국 중에는 위원을 내지 못한 국가가 더 많다. 그러므로 IOC위원은 이 지구상에서 얼마 남지 않은 지위 중에서도 그 수가 적은 일종의 명예로운 지위"(김운용, 2002)라고 밝히고 있다.

1990년대 들어와서 김운용은 1993년 대한체육회(KSC)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그리고 1996년 대통령 특사을 역임했으며, 2000년에는 전국구 국회의원에 선임되었다. 특히 그는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그러나 그는 "한국은 나에게만 기대를 걸고 있을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물론 나도 한국 스포츠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정부 당국과 범 스포츠계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아쉽다. 솔직히 나 혼자 뛰기에는 벅차다(태권도신문, 2002년 11월 11일)"며 고층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권도의 1996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은 무산되었으며, 당시 체육청소년부는 김운용의 처신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운용의 태권도에 대한 노력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독자적으로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와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실시하고 있으며, 월드컵의 정식종목 채택, 그리고 1994년 파리 IOC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 채택과 2004년 아테네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기까지 모든 것은 그의 의지와 신념이 만들어낸 쾌거라 볼 수 있다.

더욱이 올림픽이나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의 메달획득에 태권도가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효자 종목인 태권도는 김운용에 의해 1978년에 태권도 대통합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하였다. 당시 9개의 대분파와 30여개의 유파를 대한태권도협회라는 이름 아래 완전통합을 이루었으며, 지금의 태권도가 "Global Taekwondo"라는 이름으로 통용이 가능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세계화에 먼저 발을 딛었던 일본의 가라데는 아직까지도 60개 이상의 유파가 있으며,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단 한번도 채택된 적이 없었던 점을 미루어 그의 능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태권도 대통합이라는 일치 단결된 모습이 없었다면 세계의 태권도라고 부르지 못했을 뿐더러 한국의 이미지가 세계적으로 부각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태권도는 한국의 외교적 역할에서도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드니 올림픽 때 국제문화 교류원이 실시한 현지 앙케이트 조사 결과 "한국을 생각하면 당신은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란 질문에 41%가 "태권도의 나라"라고 답변했다(2002, 김운용). 이는 태권도가 모든 경기진행이 한국어로 이루어지며, 태권도의 구령과 동작의 이름 또한 한국어로 교육이 진행이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문화로 자리 매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세계 속의 태권도 보급이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많은 기여를 했으며, 한국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특히 태권도는 수입된 서양의 스포츠가 아닌 한국의 무도스포츠 수출이었기에 한국의 위상을 고취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남북한 태권도 교류는 분단된 조국에 스포츠와 문화를 동시에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남북의 태권도 교류는 다년간 꾸준히 논의되어 왔으나, 드디어 2002년에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태권도는 남북이 모두 국기로 내세울 정도로 중요시 여기는 한민족 고유의 무도로서 어떤 종목보다도 교류의 필요성과 가치가 있다. 특히 남북의 태권도는 조직, 경기방식, 기술, 용어 등에서 서로 상이한 부분이 많으므로 통일조국의 미래를 위해 직접 교류를 통한 이질성을 줄이고 하나로 통합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며, 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하나의 태권도로 나아가기 위해서 미래에는 올림픽의 태권도 단일팀 구성도 고려해봄직 하다.

이러한 필요성에 기인하여 그 동안 계속 논의되어 왔던 태권도 교류는 남북 양측이 몇 차례의 당국간 회담을 통해 2002년 9월 남측 태권도 시범단의 평양 방문과 같은 해 10월 북측 태권도 시범단의 서울 방문에 합의됨으로써 남북의 태권도를 상호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항이 김운용 1인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김운용의 스포츠외교 능력

김운용은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 1988 서울올림픽 유치 및 소련 등 동구권의 대회참가 결정문제, TV 방영권료 협상 등 무수한 당면문제의 긍정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해 주었다. 그로 인하여 IOC의 TV·라디오 분과위원장이 되었으며, 1997년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와 부산 동아시아 경기대회, 1999년 강원도 동계 아시안게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및 한·일 월드컵,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를 유치함으로써 한국 스포츠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였다. 특히 태권도의 올림픽 종목 채택과 시드니올림픽에서의 개·폐회식 남북 동시입장을 성사시킨 주역이다. 이중 대표적으로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유치,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및 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북 동시입장 과정에 대한 그의 스포츠 외교능력은 주목할만하다.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에는 당시 박종규 대한사격연맹 회장이 중심이 되어서 대회유치를 추진했는데, 1974년 10월 스위스 베른의 국제만국우편연합 건물에서 개최된 세계사격연맹 총회에서 한국의 대회개최가 결정되었다. 이때는 남아프리카 연방과 멕시코, 그리고 한국 등 세나라가 유치를 신청하였는데 남아프리카 연방은 중도에 포기하고 한국과 멕시코가 최종 후보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한국은 세계스포츠계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존재로 커다란 대회유치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었으나 ANOC(국가올림픽위원회 연합회)의 마리오 바스케스라가 사격연맹 회장을 맡고 있었던 멕시코는 이미 올림픽과 펜암대회 등의 국제대회를 개최한 경험이 있었던 스포츠계의 강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운용은 대한체육회 부회장과 한국올림픽조직위원회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가 박종규 회장(당시 대통령 경호실장) 대리로 참가는 하였지만 누구도 그 총회에 대한 긍정적인 결과는 기대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멕시코와 비교하면 한국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으며, 분단국가로서 많은 국가와 외교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하고, 경제수준도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스포츠와 관련된 모든 여건이 매우 부족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한국대표단의 대회유치 설명회에서 멕시코의 자신만만한 발표에 맞서는 정면돌파식 김운용의 대응이 받아들여지게 되어 세계 각국의 임원들에게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을 남게 하였다.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62대 40이라는 표차로 한국이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후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김운용은 이를 계기로 올림픽도 유치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 세계사격선수권대회는 10년 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처음으로 거론된 것은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직후인 1978년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를 시작한 것은 1979년 봄, 국민체육심의회를 통해서였다. 오늘날에는 우리나라가 170여개국과 외교관계를 갖고 있으나 당시에 한국과 국교가 있었던 나라는 불과 40여개국 정도였다. 그는 외교정치에서 스포츠 교류를 처음으로 교류가 시작되고 점차적으로 경제적 교류 그리고 정치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진전되는 사례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스포츠가 국경이 없는 외교적 상품으로서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김운용과 최규하 국무총리, 김택수 IOC위원, 정산천 서울시장, 박창현 문교부장관, 박종규 사격연맹회장이 출석한 국민체육심의회에서 올림픽유치 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박종규씨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반대의사를 표명하여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에 들어서서 또 다시 올림픽 유치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표면적으로 국민의 단합과 국위선양, 대외적인 홍보 측면에 있어서 올림픽보다 바람직한 범국민적인 행사는 없다고 판단하여 다시금 적극적으로 검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이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 정치적인 개입이 없지는 않았지만 올림픽 개최가 한국을 국제무대 속에서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국가 이미지를 향상시켜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올림픽 유치는 범국민적인 차원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행사로 인식되어졌다.
그러나 당시 한국 유치 대표단은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좋을지? 유치자금을 어느 순간에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등의 판단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들은 IOC위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고려인삼차와 연수정 장식품 등을 선물로 준 것이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반해 나고야에서 올림픽 유치를 희망한 일본측 대표단은 이미 나고야에 IOC위원들을 초청하기도 하였고, 그들에게 자국의 손목시계를 선물하는 등의 선심공세를 펴고 있었다.
그러나 김운용은 한국대표단이라는 자격 대신에 국제경기연맹(GAISF) 회장이라고 하는 직책으로 다른 국가의 대표들과 24시간 활동이면서 정황 분석을 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긴밀한 개인 접촉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일간 계속된 회의에서 쏟아지는 질문에 적절히 대답하는 방안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수 차례에 걸친 난관을 무사히 극복하고 있었다.
더욱이 "컬러 TV도 없는 한국에서 인공위성과 국제 방송센터를 연결하는 대규모 올림픽 방송을 원활히 진행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그는 '한국은 충분한 능력이 있고, 시설과 설비 그리고 기술 등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야말로 당시는 개발도상국 코리아에 대한 질문과 호기심으로 융단폭격을 당하는 전쟁터와 흡사하였다고 김운용은 회고하고 있다. 당시에 어떤 보도기관에서는 절대로 나고야가 이길 것이라는 성급한 예상기사를 쓰기도 하였으며, 일본의 교도통신 미야가와 기자와 LA 타임스의 겐 리치 기자도 나고야가 20표차 이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하면서 낙관적이고 자신만만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1988년 올림픽을 서울에서 유치하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예상을 뒤엎은 52대 27이라는 완벽한 승리로 나고야를 제치고 바덴바덴에서의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이 결과에 대하여 사마란치 위원장까지도 "이 결정이 어떠한 사정으로 잘못 집계된 것은 아닌지...."라고 말할 정도로 마지막까지 의심을 했을 정도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김운용 자신은 이것이 결코 기적이 아니었다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승리는 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승리를 움켜쥘 수 있는 필연적인 우리의 노력이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인 방북에 일원이 되어 평양에 동반한 김운용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게 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운용의 직책과 신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며, 김운용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방측에 알려졌던 인상과는 달리 호쾌하고 유머감각도 뛰어났으며, 열린 사고를 갖고, 매사에 자신이 넘치며, 옳다고 생각한 일은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이라고 밝히고 있다(김운용, 2002).
이들은 서로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지고 김운용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웅 IOC 위원의 면담이 이루어졌으며,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동시입장에 대한 제안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 사마란치 위원장과 김운용, 그리고 장웅은 긴급회합을 갖고 대회깃발의 문제, 입장시 인원수의 문제, 단복의 문제 등이 발생되었으나, 깃발과 입장시 인원수의 문제는 일주일만에 모두 해결점을 찾았으나 단복은 단 이틀이라는 시간밖에 남아있질 않아 큰 걸림돌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나 김운용 대한체육회장은 긴급히 연락을 취해 대·중·소 사이즈 약 300벌을 대한체육회 직원들이 양복 제조업체들을 뛰어 다니며 확보하여 단복을 시드니로 보내와 모든 문제점을 해결하였다.

드디어 2000년 9월 15일, 180여명의 선수단이 96번째로 시드니 올림픽 주 경기장에 한반도 기를 높이 들고 힘차게 입장하게 되었다. 그들 선수단은 바로 분단 55년만에 남북이 하나로 뭉쳐져서 남과 북의 동시입장이라는 벅찬 감격을 연출해낸 사건이었다. 이러한 연출의 감격 뒤에는 북한의 지도자들과 물밑 접촉을 시도하여 결실을 만들어낸 숨은 노력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감격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의 스포츠 외교적 능력과 노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타나 있다. 최근의 예를 들어, 2002년 아시아경기대회 유치를 둘러싼 대만과의 경쟁에서 부산으로 유치가 결정된 계기는 김운용의 권력과 정치능력에 의해 판가름난 예로 볼 수 있다. 당시 대만은 아시아경기대회 개최의 균등한 지역 배분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축적된 외화보유고를 자랑하며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하여 선심공세를 펴고 있었다. 그러나 김운용은 부산시민유치위원회의 우병택 위원장과 협력하여 부산유치를 향한 작전을 수립했다. 그 전략의 몇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김운용의 국제적인 인맥과 지금까지 발생한 이해관계를 철저히 활용, OCA(아시아 올림픽 평의회) 위원 100명 정도를 KOC 위원장 명의로 초청하여 부산을 방문하도록 한다.
② 1997년 동아시아대회를 부산에 유치, 동아시아대회 위원회(EAGA) 총회를 부산에서 개최한다. 이로써 EAGA 10개국 중 북한을 제외한 모든 회원국이 부산과 친근하게 될 기회를 만든다.
③ OCA 회장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④ 김운용은 중국과 일본, 인도네시아 등의 OCA 강대국을 수 차례 방문하여 의사 타진을 하고 또한, 일본에 대해서는 OCA 부위원장 자리를 양보한다.
⑤ 필리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카타르 등등 15개국과 KOC가 체육교류 협정을 맺는다. 또한 KOC , 부산 시장 등이 10개국을 예의상 방문한다.
⑥ IOC 위원장을 OCA 총회에 맞추어 초대하여 IOC 위원장과 함께 인도네시아, 중국, 캄보디아 등을 방문한다.
⑦ 김운용은 국제 스포츠계에서 얻어 낼 수 있는 각종 이익들을 관련 국가들에게 나누어준다. 이에 따라 필리핀은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의 개최권을 주고, 애틀랜타 올림픽 TV 방영권을 100만 달러로 체결토록 한다.
⑧ OCA 회원국을 각개 격파식으로 만나 득표활동을 전개하고, 그 중에서도 아랍권 국가의 표를 분산시킨다.

이러한 내용은 순수하게 김운용의 스포츠 정치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의지에서 비롯된 사항이 대부분이며, 우리나라로서는 대단히 커다란 이익을 취할 수 있었던 사례였다. 특히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give and take'의 약속은 필히 지킨다는 김운용의 스포츠 외교정치 능력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었다.

4. 한국 스포츠계에서 제외된 김운용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 결선투표 당시에 자크 로게 위원장은 "이제 평창은 투표전과는 분명히 달라졌다. 세계지도에 분명히 자리매김 했다"라고 뉴욕 타임즈(2003년 7월 3일)는 평창의 부상을 하나의 놀라운 사건으로 간주하며 인용했다(중앙일보, 2003년 7월 14일). 그러나 실제 투표상황에서는 캐나다 벤쿠버에 3표차로 실패하자 김운용에 의한 동계올림픽 유치 방해설에 대한 기사가 불거져 나오면서 국민들은 당황하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이것은 김운용 방해설의 유무결과를 떠나서 직면한 시대적 문제점들을 총괄하는 우리 정부가 해결점을 찾기에 앞서 임기응변의 한가지로 '잘되면 내 탓, 안되면 남의 탓'으로 돌리는 정치의 단면도 있으리라 생각되어 진다.

김운용 IOC 부위원장이 2004년 1월 28일 검찰에 구속됨으로써 향후 발생할 한국 스포츠 외교의 타격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스포츠계의 거물이 개인비리로 구속된 소식은 서울발 기사로 외신을 통해 전 세계로 긴급 타전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정부는 뒤늦게 김운용 대책을 발표하고 나섰다.

세계 10위권의 체육강국으로 성장된 상황에 걸맞게 그 동안 김운용은 국제스포츠계의 인맥과 힘을 바탕으로 이건희·박용성 IOC위원을 탄생시켰지만 이들은 경제활동에 주력하는 기업인이므로 스포츠 행사에만 주력할 수 없는 입장이다. 더불어 체육계 내부적으로 몇몇 인사들이 IOC 분과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중이지만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IOC 집행위원과 아시아 올림픽평의회(OCA) 집행위원은 전무한 실정이다. 지난해 7월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직후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스포츠외교 인력을 양성하는 것은 시급한 문제이지만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려면 최소 10년 이상의 장기 투자가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연합뉴스, 2004년 1월 28일).
그러나 이러한 대책은 탁상공론으로 끝나고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다시금 정부는 문화관광부 오지철 차관 주재로 정례 브리핑을 갖고 '포스트 김운용' 시대를 맞이해 스포츠 외교력 강화를 위한 '스포츠외교시스템 정비 및 스포츠 외교인력양성 추진'이라는 뒤늦은 대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단기적으로는 국제체육기구 임원 및 국제행사 유치 경험자, 전직 외교관, 국가대표 혹은 국제 심판, 학계의 교수 등을 총망라해 대한올림픽위원회 내에 국제위원회를 설치하는 스포츠 인력풀(POOL)을 구성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어학연수 프로그램 개설, 외교인력 고급화를 위한 학위과정 지원, 외국 올림픽위원회 파견근무 방안 등 고급 스포츠 외교관 육성책을 내놓았다. 예산도 향후 10년간 100억원대의 거액을 투자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스포츠투데이, 2004년 1월 28일).
이와 관련하여, 김운용 한사람이 우리나라에 이룩해 놓은 스포츠와 관련된 업적은 금전적으로는 환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IOC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 개인의 비리로 구속된 김운용에게 이미 IOC 부위원장직 자격정지라는 조치를 취했으며, 영구 제명될 수도 있다는 설이 보도되고 있는 것이다(동아일보, 2004년 1월 24일).
이러한 발빠른 조치는 IOC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것으로서 사마란치 전 위원장과의 불화설과 IOC 위원장 선거에 따른 쟈크 로게의 보복이라고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논의와 앞으로 다가올 결과는 국가의 이미지 손상은 물론이고, 이로 인해 나타날 파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중국은 자국의 국기(國技)나 다름없는 우슈를, 일본은 유도에 이어 가라테를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태권도 퇴출 로비를 활발하게 하고 있으므로 태권도가 정식종목에서 퇴출될 수 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즉 효자종목인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에서 퇴출된다면 한국의 종합 10위권 목표에도 차질이 빚어지게 되는 것 또한 염려할 부분이다(동아일보, 2004년 1월 25일). 더욱이 한국에 기반을 둔 유일한 국제스포츠기구인 WTF(세계태권도연맹) 또한 후계 구도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김운용이 없는 우리 나라는 국제 스포츠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차후 김운용 만큼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는 후계구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 국제 스포츠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인사를 정부차원에서 어떻게 육성하고 발굴할 수 있을까?
이제 김운용과 같은 능력을 가진 체육인이 나타나지 않는 한, 한 동안 우리는 제2의 한국인 김운용을 그리워해야만 할 것 같다. 따라서 정부는 앞으로의 국제스포츠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태권도 정식종목 채택이라는 미해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대안을 하루 빨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정부의 발표안이 얼마간 지속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10년 전만이라도 이와 같은 준비를 해놓았다면 우리 나라 스포츠외교 정치는 지속적으로 커다란 상향곡선이 이어져 왔을 것이다. 이것은 스포츠 선수를 육성하는데 있어서 미래를 예견하여 꿈나무를 육성하는 많은 국가로서 가까운 일본만 비교하더라도 항상 이러한 미래지향적 준비에서 우리나라는 뒤쳐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도덕성 붕괴의 진원은 자본시장이다. 시장과 가정해체 그리고 도덕심 고갈은 사익추구와 경쟁을 바탕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시장은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들고 도덕성과 거리를 멀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장이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오늘의 김운용 사태를 정치적 보복이나 판단오류로 합리화해서는 안될 것이며, 더욱이 불량아 정리(Rotten Kid Theorem)로 몰아가서도 안될 것이다. 그의 능력이나 기여를 분명히 인식하고 제2의 김운용을 탄생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Ⅲ. 결론

우리나라에는 일반법보다도 더 상위의 법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것은 속칭 국민정서법이다. 우리의 정서로는 단지 현실의 김운용 파장만으로 그를 사장시키고자 하는 반면 그가 이루어 놓은 결과들에 대해서 인정하려고 하는 정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이룩한 스포츠 외교능력 통해 얻어진 결과물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비록 인간 김운용의 비리문제가 윤리적으로 용인될 수 없을지라도 그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낸 결과들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스포츠 강국으로서 급부상 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김운용 사태가 발생되자 그와 같은 탁월한 능력을 지닌 또는 그가 이룩해 놓은 결과를 토대로 발전적 방향으로 일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스포츠외교 능력자를 갈망스럽게 요구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그와 같은 이기적·윤리적 흠집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인성과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며 뛰어난 사회적 합의 능력을 지닌, 그리고 비판적 지성을 지닌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체육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즉 균심(均心)과 공심(公心)을 지닌 자로서 현대 산업사회의 위기관리와 복지국가 발전의 불가결 조건으로 간주되고 있는 공론과 협약의 코포라티즘(Corporatism)적 능력을 지닌 체육지도자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의(義)를 묻지 않고 하필 이(利)를 묻는가'라고 맹자가 반문과 충고를 했던 것처럼 義와 利의 문제는 윤리와 경제의 이원화가 몰고 온 파탄 현상이며, 이것은 균심을 흐뜨렸고, 공심을 버리게 하였으며, IOC 조차도 합리적 이기주의자들간의 약속의 장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행함에 있어 옳은 것이 이로운 것이라는 논리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규칙 함께 지키기와 법적 강제의 확립이 요구된다.

김운용 한사람은 우리나라의 스포츠 외교가라는 힘겨운 짐을 지고 30여년의 세월동안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여 無에서 有를 창조해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는 스포츠를 행하는 사람, 스포츠를 관람하는 사람 모두가 덕스런 인간, 즉 완성된 인간을 추구해왔으며, 이것은 스포츠의 가장 커다란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스포츠의 가장 커다란 목표가 승리를 위한 것이지만 과정과 방법이 정당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김운용이 한 권력자이기 이전에 윤리적 인간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근대 이후부터 우리는 스포츠외교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발전시켜왔고, 놀라운 결과를 얻어냈다. 특히 <우리의 소원 통일>의 중요한 징검다리인 남북한체육교류 외에도 모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지켜 나아가야 할 태권도, 그리고 국제스포츠에서 한국의 영향력 행사 등 많은 일들을 이룩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다가온 문제점에 대하여 개인이 아닌 온 국민이 힘을 실어 풀어야 할 짐이 아직도 산재해 있다. 더욱이 오늘날은 국제화 시대이며, 스포츠는 국제화에 걸맞게 세계의 정치·경제·문화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안고 동양의 작은 나라가 수행하는 세계로의 발걸음은 서방 강대국보다도 더욱 박차를 가하여 진정한 승리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내일의 꿈을 펼칠 후손들에게 정당화될 수 있는 무엇을 남겨 줄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할 것이며, 김운용 사태를 커다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비록 균심과 공심을 멀리했던 김운용 사태가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우리들은 그가 이루고 행해온 스포츠외교 정치능력은 계승되어야 할 것이며, 이것이 현재의 가장 큰 당면 과제이다.

우리는 국제 스포츠계에서 스포츠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고, 우리나라의 실체를 전달하며 스포츠를 통해 국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도록 능력있는 체육인 육성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제도권에서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다.

1) 김운용 사태에 대해 문화관광부가 내어놓은 안으로서 단기적으로는 국제체육기구 임원 및 국제행사 유치 경험자, 전직 외교관, 국가대표 혹은 국제 심판, 학계의 교수 등을 총망라해 대한올림픽위원회 내에 국제위원회를 설치하는 스포츠 인력풀(POOL)을 구성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어학연수 프로그램 개설, 외교인력 고급화를 위한 학위과정 지원, 외국 올림픽위원회 파견근무 방안 등 고급 스포츠 외교관 육성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충분한 예산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2) 정부는 현재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스포츠 지도자와 선수들에게 영향력과 대중매체를 통한 힘을 실어주어야 할 것이며, 외국과의 민간스포츠교류 지원에 대한 확대 방침을 세워야 할 것이다.

3) 국내 스포츠계의 이미지 쇄신을 위한 지도자들의 자질 향상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 체육·스포츠인 스스로는 제도 및 행정 처리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4) 정부 및 책임성 있는 체육·스포츠 관련기관에서는 범국민적인 차원에서 여론 수용이 필요하다. 한사람 또는 몇사람의 지도자 계층에 의해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로부터, 그리고 체육·스포츠인들로부터 의견을 수렴하여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5) 우리 사회에서 권위주의 정권의 존속은 공익관념에 권위주의적인 함의를 강화시켰으며, 공동선 및 공익에 대한 관심마저도 반동적이며 억압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대립적인 경향을 초래해왔다. 그 결과 자유의 이름으로 방종과 만용이 정당화되고, 권리의 기치아래 책임과 의무가 잊혀지는 현상이 발생되었으며, 공익증진이라는 기치아래 자유와 권리에 대한 부당한 억압이 정당화되는 모순적 두가지 경향이 혼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공익에 대한 사익의 상보적 관계의 재인식이 필요하며, 사익과 공익을 가장 조화롭게 추구할 수 있는 덕스런 체육·스포츠 지도자를 창출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김운용(2002). 세계를 향한 도전.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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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Hersey & K. H. Blanchard(1993). Management of organizational behavior. Englewood Cliffs N. J.: Prentice-Hall.

출처: AhnsTaekwon 안용규 /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김운용 (金雲龍)

웨스턴대학 정치외교학 학사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
연세대학교대학원 정치과
조지워싱턴대학교대학원
메리빌대학 법학 박사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
국회스포츠정책포럼회장
올림파프리카 국제재단 명예위원장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특별고문
제16대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2003 대한체육회 회장
국제올림픽운동위원회 위원
2003 세계태권도연맹 창설 총재
제20차 UN총회 한국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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