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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컬럼

태권도 정신에 관한 연구

by 태권마루 2008. 5. 5.

출처: AhnsTaekwon 안용규 /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태권도 정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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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 론

무(武)의 발생은 인간 본능의 발현이다.
인류의 발생과 더불어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던 동작들이 인간의 인지가 발달하면서 인위적으로 구체화되고 체계화되면서 무술(武術)과 무예(武藝) 및 무도(武道)로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안용규, 1995).

태권도는 우리 나라의 국기로서 전세계에 한국의 전통 무예로 불려지고 최초에는 품새 위주의 호신 기술을 보급하였으나 점차적으로 대인 대전의 겨루기에 비중을 두는 경기로서 각광을 받게 되어 현재는 태권도가 세계적 스포츠로서 커다란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한국 문화의 10대 상징으로서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태권도의 경기 측면이 발전함에 따라 외형적인 발전은 이룩하였지만 실제적인 알갱이에 대한 가치나 정신, 즉 태권도의 사상적 지식 요구가 확대되고 있다.
태권도의 외현적 가치는 많은 선행의 연구와 실제적인 기술의 우월성 내용에서 이미 논증되어 왔다. 그러나 태권도의 지주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내재적 가치에 대한 연구는 아주 미약한 실정이다. 태권도의 외현적 가치가 태권도의 세계화, 태권도 기술의 우수성 및 스포츠로서의 기능면에 있다면 내재적 가치는 철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사상적 지식, 즉 태권도의 역사 및 태권도 정신면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태권도 정신은 철학적·심리학적으로 의미 있는 개념이 부여된 내용이지만 태권도 현장에서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적용되어 왔던 것 같다.  철학적 의미에서 정신은「물질적인 것을 초월한 우주의 근원적인 존재」로 규정되지만 사전에서는 정신이란「생각이나 감정 따위의 작용을 지배하는 마음의 능력, 마음을 가지는 방향 또는 사물의 근본적인 의의나 목적」으로 풀이된다.  즉 태권도 정신은「태권도의 근본 의의나 목적」또는「태권도 수련 행위에 내포된 근원적이며 이상적인 인간 의식」으로 개념지을 수 있다(김영선, 1994).
태권도 영역에서의 정신은 기술과 신체면에 대응하는 용어로써 태권도 기술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근원적 의지로 작용한다. 아울러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인으로서 이행해야 할 바람직한 행위의 실천 기준을 제시해 준다. 이러한 태권도 정신을 문제삼아 논리 정연하고 합당한 이론을 산출하는 작업이 곧 태권도 정신론이다. 이러한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 철학의 범주 속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야 할 과제이다.
태권도 정신의 필요성은 태권도 역사 정립과 함께 태권도 발전의 중심에 위치하며 그의 정립이 요청되어 왔다. 즉, 태권도 정신은 무엇인가? 왜 태권도 정신을 필요로 하는가?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 교육에 있어서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등의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의문과 필요성이 대두되어 왔다. 이러한 태권도 정신의 필요성 요구는 다음의 세가지로 구조화 할 수 있다.

첫째, 태권도 계에서 공인된 정신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어떠한 무술의 형태이건 그 행위의 근저에 있는 사상적 근원과 문화적 배경을 갖추고 있다. 그럼으로써 유구한 전통성과 체계적 틀을 지니는 무술로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무술 행위의 바람직한 지표와 이념을 표방할 수 있어 수련자에게 사상을 불어넣고 사회에 대한 존재 가치 증대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 등의 다른 무술들과 경쟁적 위치에 있는 태권도는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무술로서의 역사성과 사상적 기반을 확립하고자 하는 과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즉, 많은 지도자들이 태권도를 지도하는데 있어서의 가장 커다란 요구는 태권도 역사의 정립과 공인된 태권도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는 지도자들이 태권도를 지도함에 있어 개인의 생활 철학과 더불어 교육적 측면에서 나름대로의 태권도 정신을 고안하여 활용하여 왔다. 즉 태권도 교육과 경기 현장에서 요구되는 바람직한 사상 및 행동의 근거로서 정신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학술적인 근거라든가 우리만의 전통성, 독창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개인의 태권도의 정신은 통일된 견해로 정착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교본이나 지도서에 언급되어 있는 태권도 정신은 시각적인 면이나 내용적인 면에서 태권도와 동떨어진 한국 사상에 일관하거나 규범적이고 계몽적인 덕목의 나열로 일관하고 있어서 지도자나 수련자들로부터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따라서 태권도 정신에 대한 개인의 철학관이 명료한 주장일지라도 개인적 견해를 뛰어 넘는 태권도 공식 차원의 구체화된「태권도 정신」이 정립되어야 한다.

둘째,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의 외현적 발전과 더불어 그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해 주며, 확고한 가치의 설정을 위해서 필요하다. 설정된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가 가고자 하는 목표이며, 그것이 곧 태권도 가치로 대변할 수 있다. 현재의 태권도는 격투술적 성향이 스포츠로 변용되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특히 태권도 경기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부터는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세계적인 스포츠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스포츠로서 태권도의 수련 과정이나 경기 현장에서 획득될 수 있는 자아 실현(self-realization), 정서 안정(emotional stability), 도덕적 발달(moral development), 미적 감상(aesthetic appreciation) 및 자기 극복(self-conquest) 등 순기능적 가치보다는 스포츠의 역기능으로 대두되고 있는 승리 제일주의, 판정 비리, 상업주의, 육체 혹사 등이 판을 치게 되었다. 이러한 스포츠의 역기능 부분은 많은 스포츠 철학자들로 하여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많은 우려와 함께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머지 않아 태권도 경기 현장에서도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커질수록 승리는 쟁취되어야 하며 승리를 위한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그릇된 관념이 팽배될 지도 모른다. 결국 태권도 수련 행위도 물익 획득을 위한 수단이 되고 수련자는 신체 혹사를 불사하는 승리 제조기로 전락하는 양상에 젖어들 것이다.
스포츠의 부정적 측면은 근본적으로 철학적 사고의 부재에서 기인한다고 볼 때 태권도 정신의 확립으로 태권도 현장에서는 일단의 치유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의 궁극적 의미를 담은 설명 체계이다. 수련자가 태권도 정신을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 그 정신은 태권도의 영속적인 내적 가치로 인식될 것이다. 따라서 수련시에는 기술 획득만을 추구하고 경기에서는 승리만을 지향하는 목표달성적 의지는 점차 정신이 포함된 의미 있는 수련의 과정 속에서 용해되어 정화(catharsis)에 이를 것이다. 또한 승리, 영광, 보상 등의 외적 가치는 수련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 일시적이고 부수적인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수련자의 측면에서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태권도 정신이 지향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이자 존재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태권도 계에서는 이러한 태권도 정신을 근간으로 내적 가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자기 정화의 능력을 배양함으로써 태권도의 참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바람직한 풍토가 조성될 것이다.

셋째,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 교육에 있어서 근거를 제공하는데 필요하다.
태권도 정신은 도장에서의 교육 교재로서 대단히 중요하다. 태권도 정신은 수련자에게 태권도의 근본 가치를 인식시킴으로써 바람직한 인간으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태권도 교육에서 중요한 기초가 된다. 태권도 지도자라면 누구나 태권도를 지도함에 있어서 기술이나 신체를 발달시키는 것 이상으로 정신 교육의 가치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태권도 정신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태권도 수련에 내포한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 또는 수련외적 인간 관계에 요구되는 덕목의 의미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명확한 설명을 하질 못한다. 기껏해야 지도자 개인의 생각과 신념 기준에서 태권도 교육을 실행할 뿐이다. 이는 태권도 일선 교육 현장에 공급되어야 할 논리 정연한 태권도 정신의 부재에서 기인되는 안타까운 현상이기도 하다.
태권도 수련을 통해 습득되는 기술적 능력과 신체적 힘을 조성하고 통제하는 정신적 측면을 상세히 이해하고 체득시키게 하는 것이 명실상부한 태권도 교육이다.

지도자와 수련자 모두가 받아들이고 인식해야 할 확고부동한 지식 체계로써 태권도 정신은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태권도 내면에 존재하는 생각들을 밝히고 신체활동을 통해 재현시키는 작업이 곧 태권도 정신의 정립 작업이며 당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러한 태권도 정신을 정립해야 한다는 요구에 기인하여 현재까지 선행되어 온 기존의 태권도 정신에 관한 문헌과 사상·정신에 관련된 문헌의 탐색, 태권도 원로나 지도자와의 면담 또는 학술 세미나 등에서 나타난 자료들을 토대로한 내용 그리고 역사서 속에서 나타난 한국인의 정신성에서 태권도 정신을 탐색하여 고찰함으로써 태권도 정신 연구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Ⅱ. 태권도의 본질

跆拳道는 한자의 합성어로서 태(跆)는 발의 기술 체계, 권(拳)은 손의 기술 체계, 도(道)는 손발의 기술 체계를 바탕으로 품새, 겨루기, 격파 등 심신의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는 행위적 직관을 말한다. 따라서 태권도는 신체의 모든 부분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공격을 막으며 자신을 보호하는 공방적 기술 체계를 특성으로 한다.
태권도는 손과 발의 기술 체계를 습득함으로써 심신의 조화와 개선을 이루어 인간다운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주는 운동이다. 태권도 수련의 특성은 심신의 모든 능력을 각각 별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통일로 보는 것인데 그 통일의 중심은 곧 인격의 핵심이 된다. 이것은 태권도라는 전신 운동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인격이 향상·발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한」의 철학적 원리에 대한 이해와 예절 교육 등이 동반된 태권도 수련은 삶에 대한 적극성과 타인에 대한 이해심 곧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을 길러 준다.

태권도에서 태권(跆拳)은 기능적이고 형태적인 의미 곧 형이하의 의미를 지니는데 반해 도는 본질적 의미인 형의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태권도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운동이다. 형의상의 관점에서 도(道)는 끝없이 심원하고 수많은 기술적 어려움으로 가득 찬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자아 실현의 길로 이해된다.
도(道)는 부단히 수련하는 과정에서 자기를 수양하고 극복하고 실현하며 끝내는 자기를 완성하는 길이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태권도는 호신적 심신 단련을 위한 신체 교육과 인간 형성을 위한 정신 교육이 함께 어우러져 실천 행동으로 나타나는 행위 철학이다.


또한 태권도를 통해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천, 지, 인의 삼재 사상을 구현하자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때 천(天)은 천인합일(天人合一) 곧 우주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순응과 조화를 말하고, 지(地)는 홍익 인간 곧 박애와 평화 사상을 뜻하며, 인(人)은 심신일여(心身一如) 곧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한」의 행위 철학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태권도 수련을 통해 덕성을 함양하고 인간 완성을 위해 정진하여 참다운 무예인의 정신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1. 무도로서의 태권도

武道에서 武는 武術의 武이며 武藝의 武이다.
태권도에서 도수공방(徒手攻防)의 효율적인 기술과 건강을 위한 신체단련의 실용적 가치를 가질 때 이를 무술(武術)이라고 하며, 武藝나 武道로 발전하는 단계에서도 術은 태권도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로서 남아있게 된다. 즉 술(術)을 기본으로 하여 예(藝)와 도(道)의 단계로 확장되는 것이다.

인간의 어떤 행동에 정신과 생명의 혼을 들여 그 공(功)을 이루려고 함으로써 술(術)이 정묘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예(藝)가 되는 것이다. 즉 기술의 완성을 위한 수련이 중심적 가치가 되며 완벽한 경지의 기술을 위한 육체적 혼의 몰입을 무예(武藝)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道란 무엇인가?  道는 우선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즉, 自然의 도(道)와 人間의 도(道)가 그것이다. 자연의 道는 우주 만물의 생성 운행과 관계하는 도요, 인간의 道는 이 같은 자연의 도를 기반으로 하여 완전한 인간을 지향하는 도로 形而上의 것이다. 형이상이란 형체보다 더욱 위에 있는 그 무엇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형이상은 서양식의 형이상학과는 전혀 다르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물체를 떠난 다만 관념 만으로서의 본질을 취급하지만, 우리가 다루는 형이상은 形 즉, 形體를 그 자체로 한 단계 위로 상승시키는 그런 형이상이다. 서양에서는 형체는 어디까지나 물체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해서 물리적 운동에 의하지 않는다면 상승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형은 氣를 포함한 것이므로 물체적 운동이 없어도 상승이 가능하다. 형이상을 번역하면 말 그대로 형이면서 그 이상의 형이다. 「도를 닦는다」는 말은 이래서 성립하는 것이다. 인간의 형체 즉 몸을 수행시켜 더욱 고차원적이고 전체적인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 도의 근본 뜻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무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유도, 검도, 태권도는 인간을 더욱 고차원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무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같은 무도가 처음부터 무도로 정착하게 되었는가?

무도란 용어가 무술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한국의 경우 무도란 용어는 20세기 초 일제에 의해 도입된 외래어에 불과했다. 물론 일본의 경우도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빌어 새롭게 만든 것에 불과하다. 중국에서 무도란 일본에서 사용되는 것 같이 무도가 바로 무술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文武二藝' 혹은 '文武二道'라는 중국어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무도는 군사상의 모든 것을 의미하였을 뿐이다(諸橋轍次, 1968).
이것이 일본에 수입되어서 武士道로 재해석되어 사용되었다.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초까지 가마꾸라 시대는 武家가 일본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의 무도는 무가의 지도자가 지켜야 할 도리라는 의미였다. 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 무사로서의 긍지가 이 때의 무도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무도와는 그 지향하는 바가 엄격히 다르다(小笠原淸信, 1974).

술은 形而下이다. 형이하란 형체보다 더 아래에 속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형이하인가? 기술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형이하의 세계이다. 전쟁터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우리는 무술이라 한다. 총기나 폭탄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의 전투에서는 창이나 칼에 의한 접근전이 주로 행하여졌으며, 결국은 서로 밀착하여 맞붙는 난투극으로 결판이 났다. 이 때에는 큰 칼이나 긴 창도 소용이 없고 짧은 칼이나 맨손이 더욱 효율적이었다. 두들겨 패거나 손으로 목을 조르거나 짧은 칼로 찔러 적의 숨통을 끊는 것이다. 살해한 적군의 목을 베거나 코나 귀를 베어 전승품으로 삼는 행위는 戰功을 계산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태권도를 수련하는 곳을 우리는 도장(道場)이라 하고 도장이란 도를 닦는 곳이다. 태권도의 도장에서 우리는 태권도를 수련한다. 이 때의 도(道)란 무엇인가?
도장이란 용어는 <梁書>의 유선전에 유선이 늙어 불교를 신봉하여 집안에 도장을 세웠다고 보인다. 이 때의 도장은 불교를 수업하는 곳을 의미하였다. 수나라 때에는 절을 도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유도를 창시한 가노가 강도관을 처음에 세운 곳도 절이었음을 상기한다면 도장이 불교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도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도장에서 태권도를 배운다. 태권도를 배우는 곳이 도장으로 된 것이다. 태권도 수련의 장을 지금은 체육관이라고 하지만 전통적으로는「도장(道場)」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체육관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개념으로는 단지 신체적 활동을 통한 기능적 훈련이나 학습 개념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태권도를 비롯한 각종 무도가 점차 경기화되는 과정에서 도(道)의 개념을 잃어 가고 있는데 그 무의식적 행위가 바로 도장이라는 전통적 개념에서 체육관이라는 현대적 명칭의 변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태권도 수련의 한 가지 특징은 심신의 여러 가지 능력을 각각 별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 통일을 가지는 것으로 보고 그 통일성의 중심이라는 인격의 핵심 곧 인간 완성에 이르기 위한 수련의 도정이 전통적 도장의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형이하의 신체적 운동과 형이상의 정신 운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곳을「도장」이라 지칭하는데 이는 태권도뿐만 아니라 격기술인 검도, 유도, 합기도 등 여러 종목에서 전통적 무술의 도를 차입하고 명명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태권도에서 수련은 심신의 합일을 지향하는데 그 기본으로 신체의 반복적인 활동을 통한 기술의 신체화 곧 기술 동작의 자동화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 때 우리는 기술을 몸에 익힌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정신 곧 마음은 신체를 움직이게 하는 요인으로 상위 개념이다.  이렇게 볼 때 단지 신체 활동에 있어서 기술 동작만을 연마할 것이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의 신체 활동이 정신 운동의 상대적인 상보성(相補性)에서 출발함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초보자는 신체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마음의 움직임에 저항하게 되며 주체에 대립하는 객관성을 나타낸다. 마음과 신체는 자기 존재 방식에 있어 주체적이고 객체적인 두 가지 성질을 나타낸다.  태권도 수련을 통해 마음의 움직임과 신체의 움직임을 일치시킨다는 것은 그 두 가지 성질을 실천하여 극복하고 신체를 주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례로 품새 시연을 할 때 무의식 상태에서 동작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동작을 표현하거나 또는 겨루기에 있어 차기에 대한 받아차기의 동작 반응력 등은 표층의 의식이 아니라 객체로서 신체를 보다 깊게 주체화하는 마음인 것이다.  다시 말해 無心, 無我의 상태에서는 자기 마음과 신체의 주체적이고 객체적인 두 성질은 소실되어 객체인 신체는 완전하게 주체화되는 것이다.

태권도를 정의할 때 '태권도는 인간의 진실성을 배양하는 인간 수양의 길이다' 또는 '태권도는 극기, 자제, 자율적인 정신과 정의 그리고 예의를 존중하는 인간 수양의 도로서 평생을 일관하는 생활 철학을 함양케 한다'라고 말한다.
태권도에서 정신 운동이란 학습을 익히기 위한 방편으로 단지 머리 속에 동작을 암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되고 반복적인 신체 활동과 정신 운동을 병행해야 하고 특히 정신 운동의 요체로 깨달음을 얻고자 함께 수련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심신을 갈고 닦으며 다(多) 속의 일(一), 동(動) 속의 정(靜)을 일깨워 주는 심신일여와 천인합일을 수련하는 곳이 바로 전통적 개념의 도장이다.

무도의 본 고장인 일본의 경우에 도장은 무도를 연습하는 장소로 되어 있다. 浪人이 시가지에 차린 연습장을 町道場이라 부르기도 한다.  德川時代로 들어와 문교 정책에 의해 각 번(藩)에 학교가 건설되고 연무장이 설치되었다.  長州의 明倫館, 米澤의 興讓館, 福山의 誠之館 등은 지금도 남아 있다.
명륜관의 명륜은 <맹자>에 하나라에서는 교라 하였고, 은나라에서는 서, 주나라에서는 상이라 하였으니 배움은 삼대가 같았다. 이곳에서는 모두 인륜을 맑혔다(夏曰校, 殷曰序, 周曰庠,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 연무장의 이름이 명륜관이니 인륜을 명백히 한다는 것이다. 무도를 배우는 것이 인륜과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음을 이름에서 알 수 있다. 한국의 명륜당은 성균관 안에 있던 집인데 여기에서는 유학을 가르쳤다. 우리 나라의 그것이 무도와 전혀 관계가 없음에 반해 일본의 명륜관은 무도를 가르치는 연무장이었다. 일본 무도의 특징을 여기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다.
興讓館의 흥양은 사양함을 일으킨다는 말이니 <大學>의 '한 집이 어질면 온 나라에 어짐이 떨쳐 일어나며 한집이 사양하면  온 나라에 사양하는 기풍이 일어난다(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라는 문구에서 따온 말이 분명하다. 흥양관에서 저들은 무술을 통해 사양하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誠之館의 성지란 단어는 <中庸>에 '성실한 자는 하늘의 도요, 성실히 하려고 하는 자는 사람의 도이니, 성실한 자는 힘쓰지 않고도 도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고도 알아서 종용히 도에 맞으니 성인이요, 성실히 하려는 자는 선을 택하여 굳게 잡는 자이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誠者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聖人也. 誠之者擇善而固執之者也)' 라고 했다. 즉 誠은 진실되고 망녕됨이 없음을 이르니, 天理의 本然이요, 誠之는 진실되고 망령됨이 없지 못하여 진실되고 망령됨이 없고자 하는 것이니 인사의 당연함이다(成百曉譯註, 1989).
그러니까 誠之는 부족한 우리 인간이 완전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선을 택한다는 것은 배워서 아는 것이니 배우지 않으면 선을 택할 수 없다. 고집은 굳게 잡는다는 것이니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성지할 수 있는가? 誠之하기 위해서는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여, 독실히 행하여야 한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함은 선(善)을 택하는 것이요, 독실히 행함은 굳게 잡는 것이니 仁이 되니 이롭게 되어 행하는 것이다. 성지관에서 사람들은 무술을 통해 '택선고집'을 배워야만 했을 것이다.
명륜관, 흥양관, 성지관은 무술을 연마하는 곳이지 <맹자>, <대학>, <중용> 등의 유학을 가르친 곳이 아니다.
이 같은 연무장에서 어떻게 일본인들이 인륜을 밝히고, 사양하는 기풍을 진작시키며, '택선고집' 할 수 있었을까? 창칼을 휘두르며 명륜! 흥양! 성지! 라고 외쳤을까?  참으로 일본 민족을 묘한 민족이라고 아니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저들의 무도에 대한 철학은 우리보다 적어도 150년은 앞서서 나아가고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국 최초의 태권도장은 1944년 9월 15일 서대문구 옥천동에 이원국이 세운 청도관이라 할 수 있다. 같은 해에 개성에 노병직이 송무관을 창설하였으며, 서울역에 황기가 무덕관을 세웠다. 윤병인이 YMCA에 권법부를 만들었으며, 을지로 3가 한국체육관에 전상섭, 윤쾌병이 연무관을 세웠다.
이 때 청도관의 명칭에서 도를 道자로 파악하는 사람이 있으나 설립자인 이원국에 의하면 「청도관은 靑濤館으로 표기하며 그 의미는 '푸른 파도가 한 물결이 일면 만물결이 인다'는 뜻으로 청도관은 선한 것을 일으키는 출발점으로 보았다」고 했다. 즉 청도관의 도는 道가 아닌 濤자로서 당시의 모든 도장들의 명칭에는 도(道)가 포함되지 않고 대부분이 무술을 의미하는 무(武)자 돌림이었다.
이러한 의미로만 본다면 아마도 당시의 당수를 가르쳤던 창시자들은 일본 공수의 영향을 받아 각각의 지도 이념을 가지고 각 도장을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에 와서 우리는 과거의 당수, 수박, 태수, 권법 등의 모두를 태권도란 명칭으로 부르기로 약속하고 이를 총괄하는 대표적인 교육기관을 '국기원'이라고 하였다. 國技院의 국기란 글자 그대로 나라의 재주란 말이니 국기원이란 나라의 재주를 가르치는 곳이 된다. 그 재주는 이 경우 태권도가 됨이 당연할 것이다.  국기원에는 1971년 3월 20일 전 대통령 박정희가 쓴 '국기 태권도'란 휘호가 걸려 있으니 이 때의 국기가 태권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적 정서, 다시 말하면 전통적으로 한국은 일본의 경우처럼 재주를 숭상한 나라가 아니었다. 技에는 방술, 의술, 점술의 의미 외에도 공인, 장인이란 의미도 갖는다. 공인이나 장인은 재주꾼일 뿐 도덕을 갖춘 군자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우리 한국의 전통적 정서였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재주란 君子가 아닌 小人이 즐겨 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원래부터 道가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國技는 나라의 재주이니 形而上的 道라기 보다는 形而下的 技일 뿐이다. 대통령이 '國技 跆拳道'라 한 뜻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태권을 道로 보지 않고 技로 보았음에 틀림없다. 태권도를 국도(國道)라고 표현했었으면 안되었을까?

해방 직후 황기가 서울역에 세운 武德館은 일본의 당수를 초월하여 한국적인 당수도의 창조를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수박도의 진수는 '活'이다. 무덕관 헌장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황기, 1975).

"우리는 수련 목표가 '활'에 있다. 즉 방어나 공격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모든 것이 '삶'에 있다. 적이라 할지라도 살리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고, 우리는 자연 원칙에 입각하여 '활'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무덕관의 모든 지침을 세우고 미와 선과 속도에 치중하여 과학적으로 수련에 이바지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 헌장이다."

'활'은 수박의 공격과 방어를 통해 모든 것을 살리는 것이라 한다. 그 논리성이야 어떻든 무덕관 헌장은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道의 설정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청도관의 수련 목표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무도 정신에 입각하여 심신을 단련한다.
    우리는 상호간에 친하여 단결을 도모한다.
    우리는 관칙을 준수하고 사범의 명령에 복종한다."


이 때 무도 정신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이 없으나 심신을 태권으로 단련하는 일의 전제로 이것이 상대적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무도 정신이 태권의 수련보다 상위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다. 말하자면 무도 정신이 것이 따로 존재하는데 이것을 태권을 수련하므로서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태권도장에서는 태권도를 수련함으로써 심신이 단련된다는 핵심의 내용이 비치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한 고로 태권도가 바로 정신이라는 오늘의 윤리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무도라고 할 수 있다.

1987년에는 국기원에서 편찬한 <국기 태권도 교본>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태권도의 도에 관한 설명은 없었다. 다만 태권도 정신의 근원적 사상으로 화랑도 정신, 지행합일의 실천적 사상, 홍익인간의 이념, 조선의 유학 사상 등을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국기원편, 1987).
그러나 이 같은 사상이 왜 태권도 정신이 되어야 하는지는 전혀 논리적인 설명이 없어 교본을 읽는 이들을 난해하게 한다. 화랑들이 그 옛날에 태권도를 수련하였다는 것을 증명할 근거가 어디에 있으며, 조선조의 유학자인 퇴계나 율곡선생이 태권도에 관해 한 마디라도 언급한 적이 있었는가?
그러면서도 교본에는 태권도 정신이란 태권도 수련을 통해 함양될 수 있는 올바른 인간 행동의 바탕이며 주된 수련 목표의 하나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념적인 면의 지도 영역으로 태권도 이념이 엄연히 들어 있으나(국기원편, 1987; 85-86) 교본의 어디에도 태권도 이념이 기술되어 있지 않다.

道는 어떤 사람이라도 일정한 수련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형이상의 그 무엇이다. 그렇지만 태권의 도라 하여 그 영역을 태권도에 국한 시켰을 경우는 태권도의 도는 당연히 태권도를 수련한 사람만이 체득하는 그런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권도 교본에 道에 관한 설명이 부족한 이유는 '도를 도라고 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한 老子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道德經>의 서두에 道에 관한 이 같은 전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자는 이어서 5천자에 달하는 글을 계속 썼다. 즉 도란 용어는 그렇게 어려운 말인 것이다. 노자가 도교에서 太上으로 받들어지는 이유는 그가 바로 이 <도덕경>을 저술하였기 때문이며 실제로 그는 도를 체득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도를 체득한 사람인 노자가 쓴 5000자의 <도덕경>이 도교 경전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었다(이진수, 1997).

태권도가 무도라면 우리는 다른 무도들의 본질을 꼼꼼하게 탐구해 보아야 한다. 태권도의 본질을 알았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필요 없는 곁가지들은 과감하게 잘라 내어 단순하나 거대한 태권도의 도를 창조해 내야 할 것이다.

2. 교육으로서의 태권도

태권도는 역사적 발달과정에서 종교성과 교육적 양면성을 가지고 인격 형성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인체의 중요 부위를 단련시킴으로서 신체를 종합적으로 강화시켜 나가는 동적인 무도이다.
정신과 육체, 즉 정신과 상응하기 위하여 신체적 조건과 역량을 부여하는 태권도는 인간의 신체 동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실현이며 자기 자신이 수련하는 자기 교육이다.

지금까지 태권도 교육은 신체적 기술을 단련하는데 보다 많은 관심을 보여왔으며 정신적 가치를 증대시키는 구체적 실천 방법을 적용시키는데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체 단련을 통한 정신 수련은 태권도의 본질적 목적이며 현대인의 건강과 인격 형성에 중요한 분야로서 태권도는 충분한 교육 방법과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태권도의 정신적 가치는 교육의 부분에서 매우 중요하다.

태권도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인격 수행 방법의 하나로 행(行)·주(住)·좌(坐)·와(臥)같은 인간 기본 체형을 체계적으로 동작화시켜 신체 부위를 합리적으로 단련시켜 나가는 무도다. 따라서 육체적인 단련과 정신적인 수련의 양면을 함께 실천해 나가는 심신 수련의 교육이다.
태권도는 전통적으로 호신과 호국을 위하여 수련되어 왔으며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인격 완성이고, 이를 위해서 동적인 신체 여건을 형성하는 가시적(可視的) 행위와 정신적 단련을 위한 불가시적(不可視的) 수행을 동시에 이루어 나가는 자기 교육이다.
정적(靜的)인 정신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동적인 태권도를 수련시킴으로써 신체적인 장해와 불균형 없이 건강할 때 정적인 사유나 사고 등이 원만하게 수행되어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즉, 태권도는 각 개인이 직접 자기가 수련하는 인간 교육의 한 분야로서 개인의 인격 완성과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려는 개인 요구에 의하여 각자 건전한 정신과 육체적 발달을 도와주는 일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태권도 교육은 개인의 인격 완성을 위한 심신 수련이므로 지속적인 관심은 물론 학생이나 수련자의 발달을 최대한 촉진하고 조성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태권도의 교육자는 목표와 방향에 관하여 수련생 등에게 명확히 제시해 주고 또 반복적으로 강조함으로써 교육자가 목표에 도달할수록 적당한 지도 내용과 방법을 수련생들에게 적용시키며 교육자와 수련생들이 협력하여 집중한 노력이 교육의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교육자의 지도 목표와 수련생의 수련 목표는 같을 것이며 그 내용을 정신과 신체, 교육적 측면에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교육자, 수련자 - 정신교육, 태권도수련, 신체교육 - 인격완성, 태권도인

태권도 교육자나 수련자는 교육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그러나 수련자가 처음부터 스스로 계획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교육자가 계획 수립에 협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인 여러 가지 적성을 파악하고 환경과 개인 요구, 수련 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장면(場面)이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태권도에 대한 동기를 유발시켜 환경을 만들어 주고 수련 의욕을 높이며, 욕구의 수준을 고려하여 가르치는 일은 태권도 교육 목표에 대한 효과를 증가시키는데 매우 필요하며, 교육과정의 관찰은 개인의 노력과 방향의 정확성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태권도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욕구와 흥미에 관해서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육자나 수련자의 목표에 대한 욕구를 유발시키는 것은 교육자가 강의 혹은 수련 동안에 반복 강조함으로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적극적 노력을 할 수 있다.

욕구란 생물학적으로서 현재에 결핍을 느껴 그것을 충족시키려는 의욕을 말한다. 그러므로 욕구는 유기체 내부의 긴장이며 목적물에 대한 자기 심리 상태를 체제화하려는 긴장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목적에 도달하면 그 긴장은 해소되고 평온 상태로 돌아간다.
그러나 현재에 결핍을 느낄 수록 욕구는 더욱 높아지며 욕구 충족의 행동은 강해진다. 따라서 평온 상태가 유지되고 있을 때에는 욕구 수준을 높이고 다시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함으로서 태권도 교육의 효과를 증대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태권도의 교육 방법이 전통적 실기 위주였기 때문에 종래의 사범의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교육 방법의 적용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수련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련자의 소질, 기술 향상 능력, 정신 상태, 신체 조건 환경 등에 적합한 지도 방법, 지도 내용, 방향과 구체적 수련 방책을 제시해 주는 것이 태권도의 궁극적인 정신적 가치와 목적을 달성하는데 긍적적 체험을 제공해 준다.

흥미(interests)라고 하는 말은 욕구의 대상에 대한 관심을 말한다. 따라서 욕구가 없는 동작과 행동에는 흥미는 없다.
욕구와 흥미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으며 태권도의 실기 수련에 나타난 기술은 가시적이기 때문에 고단자들의 차기나 겨루기 동작에서 고도의 기술은 초심자나 유급자들의 욕구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즉, 태권도 기술의 진척과 향상은 수련자들의 당연한 관심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수련자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동작이 점차 향상됨을 스스로 알 때나 사범으로 부터 칭찬을 받게 되면 더욱 더 강한 수련 의욕을 일으켜 연습에 열중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흥미는 행동의 결과에 대한 관심을 뜻하며 아울러 수련자의 정신적 가치를 증대시키는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다.

태권도의 정신 교육이라고 함은 기술의 교육과 함께 태권도 교육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태권도인이라면 누구나 정신과 신체 양면의 병행 수련이 곧 목표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훈련 단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태권도 교육에서 정신수련에 대한 중요성은 강조하고 있으나 기술의 전수만을 주로 해왔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신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적용·실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태권도의 정신 수련 방법이 교육자들에 의해서 이미 체계화되어 실시되고 있어야 할 일인데도 실제로는 기술의 수련에만 치중하고 정신 교육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없이 막연한 정신 통일, 정신 집중의 중요성만 수련자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박동기는 "이는 필경 일부 지도자의 생각이 부족하여 기술과 수족만을 단련시키는데 그치고 태권도의 근원인 정신을 무시하는데서 온 폐단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태권도의 수련은 육체를 통해서 실현되고 있고 신체의 조건이 우선된다고 생각하나 정신적인 바탕이 없는 신체적인 훈련은 동물적 기능 양성의 부조화 결과를 초래하여 본래 태권도 교육의 목표와 상반되게 되는 것이다.

태권도 정신의 교육은 두가지 범주로 설정해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태권도의 목표를 향하는 정신적 태도(방향)와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방향을 정립시켜 나가는 구체적인 정신 집중의 훈련 방법이다.
태권도 정신과 기술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수련자 개인의 정신 기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중요한 기본 과제로서 인간 행동의 지배 요인인 정신 작용에서 효과적인 태권 작용 변화와 기술 변용의 지배 요인인 정신 집중 훈련은 필수적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손덕성은 태권도의 필수적 훈련 요소를 마음, 육체, 정신으로 보고 있다(Taekwondo is essentially discipline : discipline of the mind, the body  and the spirit).
그는 마음의 훈련은 태권도 정신 교육의 두번째 범주에 해당하는 마음 집중(마음의 힘 집중, 혹은 기의 집중) 혹은, 정신 집중의 훈련 방법을 말하고 정신 훈련은 첫번째 말하는 태권도의 총체적인 태권도 정신을 뜻하며 일반적으로 태권도 정신(武德)이라고 한다. 특히, 그는 마음 집중 훈련은 태권도 정신 교육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까지 강조하고 있다(Concentration is the key to the mental aspects of Tae Kwon do).
이 훈련 방법은 중국의 무도가 우리 나라에 선종과 더불어 선무(禪門武道)로 전래될 때 이미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어 전수되다가 점차 고려말, 이조시대에 현재의 태권도와 유사했던 무술이 무사의 필수 교육 과목 혹은 일반화되면서 마음 집중 훈련의 전통적 방법은 사라지고 다만 기술 훈련에만 치중했고, 기술 훈련을 하면 마음 집중 훈련이 자연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의식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태권도 수련시의 마음 집중 훈련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인 선수행법이 점점 사라지고 가시적인 기술 수련만 전승되어 왔다고 추론할 수 있다. 다만 선문(禪門)에서는 지금도 무도 수련에서 좌선이 마음 집중의 훈련 방법으로 전수되고 선무일치(禪武一致), 선검일여(禪劒一如) 등의 말이 사용되고 있으나 일반 도장에서 막연히 정신 통일이니 마음 집중이나 하여 구체적 방법이 없이 강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태권도 정신 교육의 기본 문제중 마음을 집중시켜 기술 교육에 몰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마음 집중 훈련을 선수행 등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수행은 선문(禪門)에서는 조신법(調身法), 조식법(調息法), 조심법(調心法)이 오래 전부터 선문 무도 수련의 기본 교과 내용으로 수련하였고 우리 나라에 선종과 더불어 중국 무도 전래시에 고유의 무술들과 융합, 계속 전승되어 오다가 이조시대부터 일반화 되면서 선수행법은 선문에서만 전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태권도에서 마음 집중 수련의 구체적인 방법인 선수행이 태권도 정신 교육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은 불교나 종교 수행 목적의 전유물이 아니고 무도 수련에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필수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태권도 교육의 정신적 가치는 현대인을 반복적인 자력 수련을 통하여 심신의 작용을 능동화할 수 있는 습관을 갖게 하는데 비롯된다. 심신의 습관적 단련은 정신적 의지력, 창조력, 극기력을 키울 뿐 아니라 신체적 민첩성, 강건성을 동시에 충족시킴으로서 자신감(self-confidence)과 자기 조정력(self-control power)을 배양하여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인간을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적인 자신감과 조정 능력은 정신적 이상을 미리 예방할 수 있을 뿐더러 일시적인 이상 상태를 치료할 수 있는 방책이며 집단 수련을 통한 집단성의 육성은 좋은 대사회적 성격과 태도를 갖을 수 있어서 더욱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즉,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겠다.
특히 청소년들의 가치관 확립과 학문적 욕구를 증대시킬 수 있는 교육 방법으로 태권도는 보다 현대 심리, 현대인의 정신, 현대 사회의 특징과 상황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하며 종교 철학적으로 연기론과 중도사상을 통한 정신적 가치 체계를 모색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태권도 수련자들은 태권도가 단순히 주먹과 발을 쓰는 신체 중심의 의식에서 심신을 조화롭게 발달시킬 수 있는 정신적 인격체를 양성하는 현대적 무도라는 새로운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Ⅲ. 태권도 정신의 구성 요건

태권도계에서는 태권도 정신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어떤 방법으로 그 내용을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즉 명실상부한 태권도 지식 체계로서 타당성 있는 태권도 정신이 탄생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게 마련이다.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의 핵심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련자에게 참다운 의미를 제공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권도 정신의 수립 단계에서는 다음의 구성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 수련 행위의 본질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 본질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게 하는 중요 조건이다. 흔히 태권도 정신이라고 하면 그저 수련자가 이행해야 할 규범적 태도로 국한하기도 한다.  태권도 생활과 관련된 바람직한 덕목들을 나열하여 태권도 정신의 내용으로 간주하는가 하면 동양의 고전이나 한국 고유 사상에서 나타나는 사상적 어휘가 태권도 정신으로 채택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어휘들은 태권도와 일말의 연관성이 있고 교육적 의의를 지닌 내용이라지만 외부 사상의 외형적 틀을 태권도에 씌우는 억지 춘향식의 시도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태권도 수련 영역과는 동떨어진 추상적이고 모호한 관념이나 이념의 대부분은 태권도적 내재성을 상실한 것이어서 태권도 정신이 될 수가 없다. 단지 태권도와 상관되는 사상 정도가 될 것이다.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의 목적이나 수련의 과정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의 수련 과정에서 획득되는 것, 즉 태권도 실체에서 우러나오는 본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수련자와 자신의 태권도 행위간의 내밀한 교류로부터 도출된 것이야말로 태권도 정신의 훌륭한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태권도 정신은 수련자에게 바람직한 의미를 주는 것이어야 한다.
태권도 정신의 확립을 위해서 고려되어야 할 것은 태권도 정신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내용이 수련자의 정신 형성에 도움을 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정신이란 말은 '인간의 이성적인 사고 작용'으로서 바람직한 가치관이 부여되어 있다. 특히 태권도에서는 격투 및 폭력 수단이기도 한 기술과 물리적 힘을 판단과 행동 지표로서 규정된 정신에 의해 올바르게 적용시키고자 한다. 또한 태권도 정신은 기술과 신체적 힘과 도덕적 행동간의 조화를 통해 자기 완성을 견지하는 원초적인 의지력이다. 즉 살아서 활동하는 생활자로서의 수련자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고 스스로 책임지며 주체적 관점에서 삶을 영위케 하는 밑거름이 된다.
따라서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와 수련자 사이의 궁극적 관계를 밝힘으로써 국가, 인종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획득해야만 한다. 정신은 과거 어느 시점에 국한된 특수 상황이 아닌 오늘의 이 시대를 사는 모든 태권도인에게 끈끈한 의미를 던져 주는 것이어야 한다.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 수련자에게 의지와 자각을 불어넣는 자기 극복적 신념을 제공하고 나아가 태권도계의 바람직한 풍토 조성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태권도 정신은 다른 무술 사상과 구별되는 개성 즉 독자성을 지녀야 한다.
이것은 태권도 정신의 수립에 있어 명확히 이해되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독자성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별한 성질을 말하는데 고유성, 개별성, 특수성, 독창성 등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그런데 태권도 정신의 구성 요건으로서 독자성은 태권도가 다른 무술과 비슷하다는 보편성과 반드시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성만 강조한 나머지 편협성에 빠져 '일반 속의 개성'으로서 엉뚱한 오류를 초래할 수도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태권도의 독자성만을 의식한 나머지 편협성에 빠져 오히려 태권도의 정신적 가치를 폄하시키고 있는 것 같다. 태권도 또는 태권도 정신은 다른 무술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고 방식이 문제인 것이다. 이 관점은 태권도가 중국, 일본 무술과 어깨를 견주는 경쟁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특히, 일본 가라데와의 근대 태권도 성립 과정에서 있었던 기술적 유사성을 극복하려는 의도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태권도 정신은 한국의 독특한 사상과 정신성을 반드시 함축해야 한다는 독자성의 과도한 추구 성향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화랑도 정신, 단군사상, 동학사상, 한철학 등이 태권도 사상의 근원으로 모색되어 왔지만 그 내용의 합당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여 태권도 정신으로서의 타당성이 결여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태권도 정신은 독자성과 함께 무술로서의 보편성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태권도 수련자는 모든 세계인이면서도 인간이다. 게다가 미국인, 일본인, 중국인, 유럽인, 남미인, 그리고 아프리카 사람들도 태권도를 한다.
태권도는 다른 무술과 근본적으로는 유사한 격투 기술의 한 형식이라는 보편성의 기반 위에 나름대로의 독특함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 위에 독자성은 모색되어야 하며 태권도 정신의 정립을 위해 다음과 같은 착상이 가능하다.즉, "태권도사 또는 한국사에 근원을 두고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전통적 사상", "태권도인에 의해 새로이 창출된 독창적 사상", "기타의 외래 사상이나 다른 무도의 사상과 관련이 있더라도 태권도인의 비판적이고 엄밀한 검토 아래 재구성되고 체계화된 사상"이 태권도 정신으로서 독자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넷째, 태권도 정신은 모호하고 단편적 신념이 아닌 논리 정연하고 짜임새 있는 이론 수준의 단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태권도 정신은 내용을 명확하고 일관성 있게 잘 진술하는 이론 수준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교육에 이용되는 지식으로써 또 행위의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는 지표로써 제구실을 할 수가 있다. 원래 이론이란 개개의 사실이나 인식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고 실천의 지침이 될 수 있는 고도의 보편성을 갖는 체계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어떤 문제에 대해 널리 인정받을 수 있는 일반적인 견해가 이론이 되고 그 이론이 구체화·체계화되면 지식이 되는 것이다. 견실한 이론으로서 태권도 정신이 성립되려면 실증성, 타당성, 명료성, 일관성, 보편성 등의 세부 사항이 충실히 갖추어져야 한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를 둔 추론에서 타당한 전제를 끌어내고 각 세부 내용과 결론과의 유기적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논리 전개에 사용된 중요 단어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고 명료화하면서 논리적인 진술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내용 구성은 확고한 뼈대 속에 체계적으로 분류되고 통일된 일관성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이론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설명 방식은 태권도 정신의 자격에 미달된 한낱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한 것이다.

이론적 체계는 개인의 사고, 사상 수준을 능가하는 한층 발달되고 객관화된 것으로 태권도 정신 수립에 필히 갖추어야 할 조건인 것이다.

Ⅳ. 한국인의 사상과 태권도

1. 한국의「한」사상

하나의 사상이나 정신은 개별화되어 독단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그 민족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태권도가 우리 나라의 국기로서 전통 무도임을 정의할 때 태권도의 정신은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한국의 사상과 더불어 태권도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정신이다.

한국 사상의 정립 과정을 보면 시대별로 외래 사상의 유입이 있었으니 삼국 시대부터 고려조까지에는 유교, 불교, 도교 사상이 유입되었으며 이조 말엽에 와서는 서양 기독교 사상이 유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상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매우 복잡하며 현대 한 시대의 구분이 아닌 한민족 또는 한국인의 삶을 총괄하는 하나의 사상을 내세우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삼국 시대를 중심으로 할 때는 유교, 불교, 도교 사상을 다 말하게 되고 고려 시대를 중심으로 할 때는 불교만을 말하고 이조에 와서는 유교를 그리고 최근 와서는 기독교 사상까지 함께 말하게 되는 것이다.

사제(四蹄,) 십이연(十二緣), 팔정도(八正道)를 요지로 하는 불교의 교리는 현실계를 고통으로 보고 이를 극복하는 지혜를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에서 찾으려는 종교 철학이며, 유교는 공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인륜과 덕치주의를 표방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덕교(道德敎)이다. 또한 예교주의(禮敎主義)를 취하여 신선 사상을 덧붙인 도교는 그 계율이 유교와 불교를 절충하고 있으며 그 특징은 선(仙)에 있다. 기독교는 인간의 노력보다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인격적 결단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성령의 내주로 신생, 성결의 진행에 의한 인간 변혁을 실현시키고, 새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한국의 사상 연구에 있어서는 시간적 상한선이 모색되어야 하고 그 민족의 활동 영역인 공간적 유통 범위가 설정되어야 민족사에 대한 연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학자인 R. Pettazzoni가 철학과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한말은 이러한 뜻에서인 것이다.

한민족의 사상의 맥을 바로 찾겠다는 열의는 첫째는 샤머니즘을 통하여 한국 사상의 고유한 본질을 찾으려는 것이며, 둘째는 외래 삼교인 유교, 불교, 도교의 이념을 한국사상의 시원으로 보려는 것이고, 셋째는 한국인 고유의 사고와 정서를 중심으로 한국고유사상을 정립하려는 것이다.

첫 번째 샤머니즘은 동북아 일대에 널리 펴져 있는 공통된 원시 종교 현상이기 때문에 한민족만이 갖는 신앙 형태가 아닐 뿐 아니라 신앙의 내용으로 볼 때는 서양 사회에서도 있었던 지극히 원시적인 종교 형태였던 것이다. 동양에서는 선령(善靈)을 대상으로 복을 비는 백(白) 샤먼인데 비해 서양에서는 악령(惡靈)에게 상대를 파멸시켜 달라고 비는 흑(黑) 샤먼이었던 것이다.
샤머니즘은 학문의 대상으로 사상적 체계성이 없다. 사상이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을 자연과 분리시켜 인간으로서 자기를 의식하는 동시에 정신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그 생각하는 내용, 과정 그리고 그 결과 등을 종합하는 것을 지칭한다. 즉 사상은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춘 이론으로서 세계관과 가치관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샤머니즘은 이러한 사상으로서의 조건을 구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적 특성을 들어내지 못하는 샤머니즘을 한국 사상으로 보려는 것은 결국 한국 사상의 존재와 가치성을 부정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견해로 외래 삼교인 유교, 불교, 도교 이념을 한국 사상으로 보려는 것에도 잘못이 있다. 이들 사상의 연원을 추구해 보면 한국이 아닌 것이다. 중국과 인도의 이념을 토대로 한 외래 사상을 한국 사상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들 외래 삼교가 수용된 이래 한민족의 생활 감정에 깊은 영향을 주어 온 것은 사실이나 한국 사상을 연구함에 있어서 외래 사상을 수용하여 한국적으로 발전시킨 그 주체로서의 한국 전통 사상을 망각하고 오직 객관적 수용 대상으로서의 유, 불, 선 삼교의 발생 근거만을 인식한 나머지 유, 불, 선을 중심으로 한국 사상을 논하려는 자세는 한국 사상의 본질을 모르는데서 오는 잘못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의 「한」사상은 외래의 이념을 받아들이는데의 수용성과 포용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넓은 범위에서 철학적 특수성과 보편성을 갖고 있는 「한」사상은 외래 이념이라 해서 배척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본래 상대에 대한 승산이 없을 때 경계하고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지 자신감을 갖고 있을 때에는 상대를 주저 없이 받아들여 자기편으로 만드는 이치와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한」사상은 처음부터 유교, 불교, 도교가 내세우는 인간존중, 경애, 조화의 이념을 갖고 있는 현묘한 사상이다. 최지원의 난랑비 서문에 쓰여 있는 풍류도(風流道)에서 보면 공자의 가르침인 충과 효가 있고,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베풀라는 석가의 가르침 그리고 구체성과 분석성을 갖춘 유·불·도의 이념을 쉽게 받아들여 제도를 정비하고, 사회 여러 부문에 유익하게 응용하였던 것이다. 사상적 토대는 「한」사상의 원리로 하면서 보다 심오하고 유용한 전통사상으로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천·지·인의 삼극(三極) 조화 이념을 전제로 하는「한」사상은 하늘의 입장에서 중용(中庸)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사상들을 받아들여 하나로 통일시키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유교 이념을 현실 사회의 실천 윤리로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학제, 법제 등에 적용하여 사회 제도를 정비하였고, 불교 이념은 종교, 예술 등 정신문화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도교 이념은 천문, 지리, 음양(陰陽), 의학 등 기술과학 발전에 응용될 수 있었다.

세 번째 견해로서 한국 사상에 대한 올바른 연구 방법은 한국인 고유의 본래적인 사상 체계를 전제로 하여야 한다. 고유의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한민족이 갖고 있는 생각, 습관 그리고 전통 전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사상은 한국인을 주체로 한 한국적 사상 내용과 사상 체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고대부터 인류문화 발전에 공헌해오고 있는 몇몇 민족들은 그들의 문화를 상징하는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를 문화목록어(inventory)라고 한다. 희랍인들은 arche, 히브리인은 torah, 아랍인들은 allah, 인도인들은 buddhism, 중국인들은 taoism, 일본인들은 shintonism, 이스라엘인들은 zionism, 미국인들은 progmatism을 그들 사상의 상징어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민족마다 각기 자기의 고유한 사상을 나타내는 용어를 갖고 있는데 수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한민족이 자기 나름대로의 사상을 정리할 수 있는 용어를 갖는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이근철, 1994).

그러므로 한국 사상을 주제로 하여 정의할 수 있는 용어는 「한」(Han)이어야 한다. 「한」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한국인의 실존이며 생물적인 본능에서 우러난 말인 것이다 그래서 「한」은 나라이름과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 「한」겨레, 「한」글이 그것이다. 한민족의 사상체계는 「한」에서부터 발생하였던 것이다.

분명 한민족은 삼국시대 이전에도 동이 배달민족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가졌던 것이며 중국의 한자(漢字) 문화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독자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정약용도 아방강역고(我邦彊域考)에 쓰기를 "옛날 대륙에서 남쪽으로 향해 온 민족이 그들의 우두머리를「한」이라 불러 이런 통치 형태에서 「한」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말하였다. 주시경도 국어문전음학에서 "한없이 넓고 넓은 우주 안에 일(一)이 있다"고 하였으니 여기서 (一)이란 곧 「한」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언문이라 불려지던 우리의 글을「한」글이라고 고쳐 쓰게 했던 것이다. 이윤재는 한글 강의에서 "한글은 한이란 겨레의 글, 조선의 글이란 뜻이다. 한글은 주시경 선생이 「한글 배곳」이란 것을 세우니 조선어 강습소란 말이다. 그 뒤로 조선글을 한글이라 일컬어 온다"라고 하였고 이어서 "한글의 「한」은 우리의 고대 민족의 이름인 한족(桓族)이나 한국(桓國)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한」의 기원을 크다(大) 또는 하나(一)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최남선도 조선 상식문답에 "융희 말년 조선광문회에서 조선어 정리에 대하여 종종 계획을 할 때에 조선 문자를 조선어로 칭위하자면 무엇이라고 함이 적당하느냐는 문제가 생겨 마침내 세계 문자중 가장 거룩한 왕자란 뜻으로 「한」글이라 부르자는 말이 가장 유력하니 「한」은 크다(大)를 의미함과 함께 한(韓)을 표시하는 말임인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최현배는 한글갈에서 「한」을 일(一), 대(大), 정(正)으로 해석하여 놓았다. 한국인의 언어 생활에서 보게 되는 한강, 한낮, 한밭(大田), 한길, 한복, 한숨, 한무리, 한평생, 한사발, 한껏 등은 모두 「한」의 맥락에서 생긴 말로서 한국인의 얼이 스며든 낱말들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사상을 「한」사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유, 불, 선 삼교의 외래 이념에 대한 관념을 떨쳐버리고 한민족 사상의 독자성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도「한」사상은 간결하면서도 참신한 느낌을 주게 된다. 「한」사상은 곧 한국인에 대한 한국인 자신의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한」은 본래 일(一)이라는 셈수에서 나온 것인데 한국에서 han(a)은「한바다-큰바다」에서의 「한」이나 「큰」을 뜻하는 것으로 셈수 하나(一)의 의미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 「한」은 몽고에서는 Khan(干)으로 그리고 만주어에서는 han(干)으로 말해졌으며 뜻은 다같이 대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대왕을 의미한 「한」은 그대로 나라 이름으로 불려졌으니 몽고의 차가타이 칸국(干國), 오고타아 칸국(干國)이 있고 중국에는 한(漢)나라가 있고 한국에서는 고대의 한국(桓國),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과 지금의 대한(大韓)이 있었다. 또 「한」은 신(神) 짐(朕)을 의미하는 것으로 크고 위대함을 그리고 신성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민족의 고어인 이두(吏讀)문에서도 이미 「한」을 간(干)으로 적었으며 이「한」은 본래 마립간(麻立干), 서불한(敍弗漢) 등 위대함을 나타내는 존칭으로 쓰였었다. 본래 한국의 고대어에서 보면 크다(大)의 옛말인 "하", "크"의 두 단어가 병존하였으나 후에「한」「큰」으로 분화되었던 것이다.

「한」을 민족사의 근원으로 밝힌 천부경과 삼일신고에서도 일(一)을 무한수로 쓰고 있다. 천부경에서 보면 「일시일석삼극무진본(一始無始一三極無盡本)」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우주의 기본 도체를 설명한 것으로 '일(一)은 우주의 근본이며 만유의 비롯되는 수이니 일(一)보다 먼저 비롯된 것은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삼일신고의 신리대전(神理大佺)에서도 「통언지측위일위, 일자통언지야(統言之則位一位, 一者通言之也)」라고 하고 있어 '하나(一)는 본체를 말하는 것이니 큰 하나로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임을 뜻하고 있다. 여기서도 일(一)은 가정적 일(一)을 말하는 것으로 처음도 끝도 없는 일(一)을 의미한다. 즉 일(一)은 도(道)와 같은 것으로 모든 존재의 근원임을 가르키고 있다.

단군철학석의(檀君哲學釋義)에서도 우주 삼라만상의 근본적 실재를 일(一)이라고 했다. 천부경과 삼일신고 그리고 단군철학석의에서 말하는 일(一)은 셈수에서 일(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초월하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숫자로는 해명이 불가능한 무한한 의미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일(一)이란 만물생성의 근본적 의미를 말하는 것으로「한」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한단고기(桓檀古記)에서는 단군 개국신화를 실재하였던 역사적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한국(桓國)은 지상국가로 7대에 걸쳐 존재하였고, 신시 시대까지 18대의 왕위가 계승되었다고 되어 있으며 단군도 한 사람이 아니라 47대까지 계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실증사학(實證史學)을 내세우는 학자들 중에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설화가 비과학적인 신화성을 띄고 있고 있다는 이유로 단군의 실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다. 단군정신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항하여 싸운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고, 홍익인간 정신의 이념적 근거가 된다. 제헌 국회가 개천절을 국경일로 한 것은 단군신화에 대한 우리 민족의 확신을 재확인한 것이다.

본래 신화에는 그 시대의 관념과 사회상들이 깊이 스며 있으므로 이것을 과학적으로 재조명(再照明)하고 신화가 가지고 있는 이념 내지 사상성을 밝히는데 의미가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레비 스트로스(Levi-Strauss)는 그의 구조주의적(構造主義的) 방법론을 통해 신화가 내포하고 있는 사상과 세계관을 규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지극히 비논리적인 것 같은 신화의 내용이지만 신화를 구성하고 있는 신화소(神話素)의 형식에서 보면 모든 신화는 구조적 대응 방식을 갖게 되고, 신화를 구성하는 감각적 이미지(image)는 어떤 형식을 갖추고 있던지 논리적 틀을 갖게 된다고 하였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러한 신화의 분석 방법을 만화경(萬華鏡)적 방식이라고 하였다.

단군신화를 구조론적으로 분석하여 보면 첫째, 한민족은 천·지·인 합일사상이 단군신화의 중심 사상이다. 즉 하늘과 땅과 인간을 하나로 보는 것이 단군신화이다. 하늘과 같은 인간의 존엄한 지위와 땅위의 모든 만물을 생(生)하게 하고 다스리는 영엄한 능력과 천지와 하나가 되어 영생 불멸하는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천지자연을 숭상하고 인간을 숭상하는 천지인 삼극사상(三極思想)을 널리 펴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이념, 우주 변화의 이치에 따라 발전하는 사회가 되도록 하는 재세이화(在世理化), 국민과 더불어 창조의 뜻을 펴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을 이상국가 건설의 지도 이념으로 삼았다.
둘째, 단군신화를 통해 본 국가관은 천상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서로 통할 수 있는 하나로 인식하였다. 한민족은 현실적 지상국가를 단순한 땅위의 나라로만 본 것이 아니고, 천국(天國)과 신선국(新仙國)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지상천국으로 보았다. 일반적으로 천국을 인정하는 민족은 지상국가를 죄악시하고 또 지상국가(地上國家)를 중요시하는 민족은 천국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한 민족은 천상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둘다 인정하고 있다. 지상국에는 육체를 가진 유한한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천국은 인간 아닌 신이 사는 곳이지만 이 두 나라는 서로 왕래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셋째, 한 민족은 현세 긍정 사상을 갖고 있다. 단군신화의 분석에서 보면 곰 잉태의 소원성취는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다른 민족의 신화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과 땅과 인간은 하나이다」라는 명제로부터 출발한 천·지·인  합일사상은 인간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능력을 통해 지상의 나라를 이상국가로 가꾸는 것이다.

한민족의 역사는 문헌 기록이 확실한 삼국시대부터 다루게 될 때 한민족의 역사는 불과 2천년 역사로 끝난다. 그러나 단군, 기자, 위만 조선 등 고대 국가의 역사까지 다루게 될 때 한민족의 역사는 4천여년의 역사가 된다. 단순히 근대 개념의 민족 의식을 전제로 하여 민족을 논한다면 실증사관에서 보는 데로 2천년의 역사밖에 말할 수 없겠지만 기록 사관에 바탕을 두고 민족의 기원을 보면 한민족의 뿌리는 매우 깊고도 오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민족의 시원을 동이족에서 찾고 동이족이 바로 고조선을 일으켰으며 동아 문명의 주인공이란 주장은 이제 고고학적으로 그리고 문헌적 자료에 의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다.

일본인 학자들에 의한 역사 날조와 중화우월주의(中華優越主義) 철학에 의한 중국 속방설 그리고 북한의 유물사관 계급투쟁 이론에 의해 굴절되었던 한민족의 상고사가 이제 실증적으로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역사가 단지 2천년에 머물 수 없다는 증거는 많은 고고학적 연구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민족에게는 구석기 문화가 없었다는 일본인들의 가설은 한반도에서 구석기 유물들이 본격적으로 발굴됨에 따라 무너지게 되었다.

1987년 소련의 고고학자「유리 모차노프」가 시베리아에서 2백만년전 돌 도구를 발견하므로써 첫 인류는 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라는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동이 조선족의 역사적인 위치는 점점 확고해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문헌을 중심으로 고증하고 있다. 중국의 후한서 동이전서문(東荑傳序文)에도 BC 625∼614년경 서언왕이 초(楚)나라 목(穆)왕에게 패한 후 동이족은 북왕의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및 산동반도 일대로 이동하였고 그 후 중국을 통일한 진시왕이 회(淮)와 사(泗) 지역의 동이족을 흩뜨려서 중국의 백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동이족이 아시아 일대의 전지역에서 활동하면서 광대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호상에 의하면 강성한 동이 세력을 꺾었던 진시왕 자신이 동이족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의 민족 기원은 동이∼예맥에서 찾게 되고 그 이름은 동이계가 살았던 전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말 즉 위대하고 밝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한」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이러한 「한」의 문화를 중심으로 슈메르 문명과 아메리칸 인디언 문명이 동서로 뻗어 나갔으며, 인류의 문명은 서방으로부터 동방으로 흘러 들어온 것이 아니라 동방에서 서쪽 방향으로 옮아갔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이상 「한」의 문화권이 곧 인류 문화의 시원임이 분명하며 초고대문명의 가장 순수한 모습을 갖고 있는 곳이 한국인 것이다. 슈메르, 한국, 인디언의 문명사적 조명은 「한」사상의 문화사적 세계성을 규명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윤내현(1986)이 밝히고 있는 고조선의 강역이 종래의 개념을 훨씬 뛰어 넘어 북경 동쪽 즉 난하로부터 청천강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라는 주장과 함께 고대 「한」의 민족이 이룩한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도대학 우데다(上田)교수는 지금까지의 동양사는 다시 써야 한다고 말하면서 토인비의 역사관도 바꿀 것을 주장하였다. 중국의 사료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재구성한 윤내현(1986)의 연구는 단군 조선의 실체를 증명는 것이었으며 한국문화의 원류를 이루는 것이었다.

소련의 자리 카시노바가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에 독자적인 높은 문화를 가졌었다'는 주장과 함께 고조선의 실존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문헌 사학자인 이병도도 단군 조선이 신화가 아닌 실제로 있었던 한민족의 고대 국가였음을 밝히고 있다.

식민학자들은 한민족이 문화 창조능력이 없으며 한국의 민족 문화는 모두 주변 강대국의 문화를 차용·모방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여 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배격하여야 할 식민사관(植民史觀)인 것이다.

고대 중국의 문화는 대부분 동이족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며 고대 일본의 문화도 한국의 이민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이 여러 문헌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종교, 철학, 예술, 문화도 거의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인 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민족은 단순한 동아시아 문화의 차용 모방자가 아니라 창조자였던 것이다.
즉, 옛 기록에 의한 「한」의 문화는 매우 우수하였으며 창조적이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2.「한」사상과 태극 이론

태권도는 '跆拳'과 '道'의 합성어로 태권은 음(陰)이고 도는 양(陽)이다. 또 跆拳이 동(動)이라면 道는 정(靜)이며 태권이 형이하학적 개념이라면 道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이경명, 1997). 이처럼 음양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태권도에서 道는 무도의 본질로 작용하여 그 근본 원리가 된다.

道는 동양 철학의 전체를 꿰뚫는 형이상학적인 중심 개념으로 '태극(太極)'이라고도 한다. 이때 태극이라는 용어는 우주 자연에서 유일(太)하고 지고(極)한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지칭한다.

태극은 무극(無極)의 다음 단계로서 하늘(양)과 땅(음)이 나뉘기 전에 우주 만물의 모든 존재와 가치를 낳은 궁극적 실체로서 태극의 상태에서 음양이 생기고 음양에서 오행 원리가 생겼다고 한다. 따라서 태극은 한민족의 상징으로 음양 변화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태극사상은 易에서 나왔고 이 易은 팔괘장의 팔괘원리(八卦原理)와 태극권(太極拳)의 원(圓)의 原理와 태극(太極) 오행(五行)이 적용되었으며, 형의권에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跆拳道의 태극 품새도 선천팔괘(先天八卦)인 하도(河圖)의 배열순서로 되어 있다. 易은 日과 月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인데 日은 해를 뜻하고, 月은 달은 뜻하며 음과 양을 뜻하고 변한다는 用의 의미도 있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음(陰)과 양(陽)의 二元을 세우고 이것을 강(剛)과 유(柔)로 구분하고 동(動)과 정(靜)으로 배합의 원리가 점차 번져 나간다(안용규·김창룡, 1995).
강(剛)과 유(柔)는 拳法에서 가장 중요하고 拳法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武術에 있어서 拍子(强, 弱)는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것이다.  박자가 맞지 않는 무술 동작은 생명이 없는 죽은 것이다. 動과 靜의 이론은 內功世界와 가장 밀접하여 종교적 禪의 경지를 설명한다.

태극설(太極說)은 陰과 陽의 두 큰 기운이 서로 합하여 하나로 융화되거나 떨어지면서 만물이 태어나고 발전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天地가 생겨나기 이전에는 무색무형(無色無形)이고 혼돈(混沌)이며 무극(無極)이라고 하였다. 無極에서 하나로 모이니 氣가 되고 움직여서 陽이 된다(太陽). 그 陽이 움직여서 최고로 되어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靜이 되면 陰이 된다(太陰). 陽의 정기는 불(火)이다. 陽이 커져서 太陽이 되니 이것이 해다.  陰의 정기는 물이다. 陰이 커져서 太陰이 되니 이것이 달이다.
太極은 陰陽에서 다시 思想으로 갈라지고 다시 八卦로 나누어진다. 이 여덟개의 八卦를 乾, 兌, 離, 震, 巽, 堪, 艮, 坤이라 부른다. 이것이 선천팔괘(先天八卦)이다. 先天八卦는 복희(伏犧)시대 황하에서 나온 龍馬의 등에 있었던 모양이 근원이라고 하여 이것을 하도(河圖)라고 한다. 가정원리로 표현된 후천팔괘(後天八卦)가 있는데 後天八卦는 우왕(偶王)시대 낙(洛)에서 나온 신구(神龜) 등에 새겨진 팔방진(八方陣)의 근원이며, 낙서(洛書)라 한다.
이 八卦로 부터 五行이 나오는데 五行은 木, 火, 土, 金, 水의 다섯가지 성질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수리(數理)로 표현되는데 목(木)은 음양수(陰陽數)인 3, 8로, 불(火)은 2, 7로,  흙(土)은 5, 10으로, 쇠(金)는 4, 9로, 물(水)은 1, 6으로 표현한다.
팔괘(八卦)를 자연현상에 부합하여 천(乾)과 지(坤)는 상하에 위치하여 서로 당기고 山(간艮)과 못(태兌)은 평지에서 보아 오목볼록 서로 반대하는 입장이면서 그 氣를 서로 통하며 번개(진震)와 바람(손巽)은 서로 가까와지면서 그 위력이 대단하다. 물(水:감坎)과 불(火:이離)은 서로가 상반된 성질을 가지면서 서로 싫어하는 일이 없이 힘을 합하여 일을 완수한다. 이 八卦를 교차시켜서 64괘가 된다.

만물은 진(震)에서 태어난다 하는 것은 동방(東方)이며 양기(陽氣)가 처음 발생하는 봄이기 때문이다.
손(巽)에서 형태가 갖추어진다는 것은 손은 동남이고 갖추어지는 것은 만물이 결재하는 의미이다.
이(離)는 명확하게 만물이 서로가 성장하여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離가 南方의 卦이기 때문이다.
곤(坤)이란 대지를 말하고 만물이 모두 대지에서 생명과 양분을 받기 때문에 곤에 致役한다고 하고 있다.
태(兌)는 가을이고 결실의 계절로서 만물이 그 성숙과 수확을 기뻐한다.
건(乾)을 전(戰)이라 하는 것은 건이 西北의 괘이고 秋冬의 교체는 양기와 음기가 서로 가까워지고 능가하는 것을 말한다.
감(坎)은 물이다. 겨울에 해당하는 正北方의 괘 위로 휴식의 卦이다. 겨울에는 만물이 잠복할 때 쉴 대로 돌아가서 위로 휴식한다.
간(艮)은 동북의 괘로서 만물이 일년을 마치고 다시 새로운 일년을 시작할 때이다.

이것은 후천팔괘(後天八卦)의 설명이다. 이와 같이 易 사상이란 자연 속에 있는 만물이 천지의 氣를 받아 생기고, 자라고, 번창하고, 멸망하고, 재생하는 사실을 모든 상(像)에 결부하여 설명한 것이다. 동양 무술의 拳法(태극권, 형의권, 팔괘권 등)도 이 易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무도를 動과 靜으로 나눌 때, 動에 해당하는 무술의 동작들을 外功(動功)이라 하고 靜에 해당하는 수행을 內功(靜功)이라고 한다.

跆拳道 武德館의 창시자인 황기는 모든 무술을 수박(手搏)으로 보고, 수박을 外功과 內功 및 心功으로 나누었다. 動功은 품새에도 나타나 있고, 고대 수련법인 역근경(易筋經)이나 팔단금법, 화타의 오금희 십이단금법 등에 나타나 있다. 內功 수련은 動功의 기초가 되면서 정신 수련의 절대적인 부분이다.

무술은 마음의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서 깨달음의 수행을 위하여 만물의 조화(調和) 이치(理致)를 몸동작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몸으로 행하는 무술의 몸동작은 마음의 그림자 즉, 겉모습이다. 우리의 선조는 마음의 표현을 무술의 형태로 나타내어 우리가 볼 수 있는 길(道)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김창룡·안용규, 1995: 210∼218).

우리 나라 太極旗의 기장인 태극도형(太極圖形)은 어느 도안가에 의하여 일조일석에 고안된 것이 아니고 수천년 전부터 우리 민족의 신성부호(神聖符號)로서 애용되어 온 민족의 부호(符號)임이 역사적 사실로서 증명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의 원형이 독립문에 조각되어 있는데 중심에 태극이 있고 네 귀에는 팔괘(八卦)의 네가지 괘가 있다. 우리가 태권도의 품새에서 만나게 되는 태극 품새와 팔괘에 해당되는 1장에서 8장까지의 학습 단원이 바로 그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나라의 태극형(太極形)은 『주역』에서 인용된 것이 아니다. 『한국사대사전』에서 태극은 원(圓)이라고 하였다. 『주역』의 태극은 음양을 바탕으로 문자를 표시한 것인데 반하여 『한단고기』의 태극은 천(天)·지(地)·인(人)을 세 개의 원(圓) 곧 태극 무늬로 모이게 한 것이다.

태극 무늬는 두손(왼손이 오른손을 잡아)을 맞잡을 때 생기는 무늬이다. 두 손을 맞잡아 태극형을  만드는 것을 공수(拱手)라 하며 공수는 마음을 모아 염천(念天), 곧 하늘(참)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태극 무늬의 본뜻이다.
이 태극 무늬는 공예 분야에서 많이 쓰이는데 이는 오묘한 우주의 원리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 담겨지고 매일 매일의 생활이 하늘의 신비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후세의 중국 학자들이 역리(易理)를 도상화(圖象化)시켜 태극도(太極圖)를 만들었으나 이는 曲玉을 두개 配應시킨 것과 같이 우리의 太極 圖形과는 그 종류가 다른 것이고 오히려 宋明時代에 隱者와 道家들에 의하여 전해졌다는 천지자연 그림(地自然之圖)이나 古太極圖와 같은 것은 中心의 圖形이 우리의 태극도형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도형의 주위에 배열시킨 역괘(易卦)는 중심의 도형과 전연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서 자유중국의 학자들은 이 도형과 역괘는 아무런 관련성을 가지지 않는 도가들의 만화에 불과한 것이라고까지 혹평하고 있다.
본래 태극 도형과 易은 그 발생계통이 각각 다른 것이므로 서로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역괘란 것은 태극도형을 부호화한데 불과한 것이므로 태극도형을 - - 과 ―의 부호로 해체해 나가면 수많은 易의 卦가 생기는 것이고, 이 易卦를 다시 복원시키면 태극도형이 되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두뇌 작용이 착잡한 모든 사상을 단 하나의 신호로 고치고 그 신호를 보내느냐 안보내느냐의 실무율(悉無律)에 따라서 처리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또한 인간의 두뇌를 대행하는 전자 계산기와 같은 수와 문자를 0과 1로 부호화 하여 처리한 후, 그 결과를 우리의 인식에 알맞도록 다시 복원시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太極圖形에 있어서의 靑色과 赤色, 易에 있어서의 - - 과 ―, 인간 두뇌작용에 있어서의 可와 否, 전자두뇌에 있어서의 0과 1은 모두가 꼭 같은 한가지의 부호로 그 발생 계통에 따라서 표시가 달라질 뿐이다.
이와 같은 태극도형과 易의 관계는 인간의 두뇌와 그 작용과의 관계처럼 體와 用의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體인 圖形과 用인 易卦를 각각 따로 다룰 때에는 그 원형이 변치 않는 한 관찰자의 좌표에 따라서 그 위치도 변화될 것이지만 양자를 배합시키는데 있어서는 상호의 위치에 털끝만치라도 오차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태극도형이 수천년 동안 전해 오면서도 오늘까지 이에 대한 석연한 해석이 내려지지 못했고, 더욱이 원형 주위에 易卦를 배열시키는데 있어서 각인각색으로 통일성이 결여되어 온 것은 오로지 원형과 易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쓰고 있는 太極旗의 旗章이 圖形과 易卦의 배합에 완전한 합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 민족의 발상 부호인 태극도형의 유래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뜻을 천명함으로써 우리 국기의 우월성을 재인식시키려는데 목적을 두어 천명한 국기 해설에 그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극도형에 관한 설명은 易의 근저인 본질에 접하게 되었고, 또한 과학의 심부에 파고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주는 본래 하나의 素原이 한가지의 원리에 의하여 운행되는 것이므로 삼라만상 개개의 物性을 실험을 통하여 정리한 후 그 속에서 어떤 공통 원칙을 뽑아 공약해 들어가는 귀납적인 방법이 과학이라면, 易學은 이미 정해진 대원리를 파악하여 이를 演化 발전시켜 만유에 적용해 나가는 연역적인 학문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은 이미 이루어진 사상을 외부로부터 관찰하여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렇게 된 까닭을 탐구하는 학문이고, 易은 근본 원리를 포착하여 앞으로 이루어질 사상을 演化 추정해 나가는 학문인 것으로서 易과 과학이 그 극점에서 서로 합치되고 있음은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이것이 오늘 태극도형을 해명하는데 있어 易理와 과학이 같은 이론으로서 전개되는 이유이며, 새로운 태극 이론이 구성되는 까닭이 되는 것이다.

미국의 천재적인 수학자인 로버트 위너는 오늘날의 자연과학이 전문화되고 세별화되어 감에 따라서 각 분야와 분야 사이에 완전한 공백상태가 생겨 각 분야가 차츰 고립화되어 가는 현실을 직감하고 그 자신이 수학, 물리학, 전기통신공학, 정신병리학 등 각 분야의 학문을 연구한 끝에 이러한 각 분야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발견하여 사이버네틱스라는 새로운 과학분야를 개척하였다. 이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는 오늘날 많이 부르짖고 있는 제2차 산업혁명, 또는 제2차 기술혁명의 발판이 되고 있는 자동화의 기초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기계가 자동화하면 그 만큼 위험성이 높아져 이에 대한 제어의 필요도 증대되는 것이므로 오토메이션은 단순한 기계의 자동화가 아니고 안전을 확보하는 자동제어 장치를 갖춘 자동 조종을 말하는 것인데 사이버네틱스는 이러한 제어에 쓰이는 통신 수단이 무엇이고, 또한 외부에서 오는 정보와 통신문에서 지령을 형성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인 것이다.
이와 같은 제어에 쓰이는 정보나 지령은 태극 이론의 기초가 되어 있는 易數, 다시 말하면 - - 과 ―, 또는 0과 1 등의 부호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대뇌 생리 작용에서 힌트를 얻어서 이진식 부호인 0과 1을 써서 전자두뇌를 만들 것을 처음 제창한 것도 역시 로버트 워너였던 것으로 그 이론은 뒤에 실천에 옮겨져 오늘의 컴퓨터 시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대수학자이며 철학자인 라이프니치가 0과 1을 無와 神에 비하여 萬有는 이 두 가지로 구성된다고 감탄한 것이나,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르만 헷세가 易을 인간 최고의 지혜라고 설파한 것도 결코 偶然之事가 아닌 것이다.
태극 이론은 易과 과학을 결합하여 하나의 이론으로 전개하는 새로운 사이버네틱스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수천년 동안 신비 속에 싸여 오던 易理는 이제 베일을 벗고 그 본질을 나타나게 된 것이며, 나아갈 길이 막혀 막다른 골목에서 허덕이는 소립자 물리학이나 우주과학 등 고차원의 과학은 새로운 진로가 열려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태극 이론은 비단 易理와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종교, 철학, 정치, 경제, 사회학 등 어느 것에도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으로서 이는 宇宙萬有가  하나의 素原과 한가지의 이론 위에서 이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白光河, 1965: 9∼12).
태극도형이 우리 나라 국기의 기장으로 제정 사용된 것은 1883년 1월부터였으나 이 도형이 한민족의 신성한 부호로 널리 쓰여진 것은 수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이를 무슨 무늬라고 불렀는지 옛날 명칭은 참고할 길이 없지만 태극도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중국에서 태극도설이 발표된 뒤 정주학이 우리 나라로 유입된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로 이 도형 자체가 중국의 太極圖說을 발표하기 수백년 전에 우리는 이 도형을 신비의 부호로 쓰고 있었다는 것이 역사적 유물로써 입증되고 있다.
중국의 주렴계(周濂溪)가 처음으로 태극도설을 발표한 것은 송나라 神宗 때의 회령 초기로서 우리 나라 고려 文宗 24년 1070년경이 된다. 그런데 1959년 12월 국립 박물관에서 발굴한 신라시대의 感恩寺 石刻에 새겨진 태극도형은 감은사 준공이 唐나라의 개요 2년인 682년으로서 주렴계가 태극도설을 발표한 것보다 388년이 앞서 있는 것이며, 허재의 석관에 새겨진 태극의 도형은 정주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170년전에 사용되었던 것으로서 이 두 가지 사실로 보더라도 태극도형이 우리 민족들간에 신성한 부호로서 몇 천년 전부터 쓰여 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중국의 태극도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朝鮮古蹟圖譜에 수록된 왕릉의 長明燈 고령, 능경 등에 새겨진 태극도형을 보더라도 태극 주위의 八卦를 그린 것은 고려 말기부터이고, 그 전에는 태극도형만이 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주렴계 등 중국의 태극도설이 우리에게 미친 것은 정주학이 도래한 훨씬 뒤인 것을 알 수 있다(안용규·김창룡, 1995).

3.「한」사상과 태권도 정신

태극에 대한 이론은 홍익 인간 이념인 삼극일체(三極一體) 사상에서 발상되었으며 태극은 홍익 인간 이념을 유상화한 징표이다. 태극의 요소는 세 개의 곡옥(曲玉)이 모아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큰 원에 세 개의 작은 원(천·지·인)이 모여야 되는 것이다. 이때 천·지·인의 형상은 원(○ / · ), 방(□ / ㅡ ) , 각(△ /ㅣ )으로 표현된다. 천·지·인 삼극은 삼재(三才)라고도 하는데 이는 하나의 몸체로 '삼극은 한몸이다(三極一體). 하나에는 셋을 품는다(執一合三). 셋이 모여 하나로 돌아감이다(會三而歸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앞에서도 밝힌 바와 마찬가지로 『한단고기』에서 한(桓, 一)이란 전일(全一)로 모두를 하나로 모은다는 뜻이다. 여기서 전일이란 '모두가 하나라는 뜻'으로 철학적「한」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一)'는 홍익 인간의 이념이기도 하며 널리 인간을 크고 이롭게 한다는 뜻을 평화 사상을 담고 있는 국조(國祖) 단군의 건국 이념이다. 「한」은 우리 한민족의 주체 사상이다. 한민족의 정신적 뿌리로서 그 뜻은 크다. 높다, 밝다, 환하다, 음양이 하나이듯 전체적으로 하나다 등으로 의미가 다양하다. 일체성의 뿌리는 전체적으로 하나라는「한」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한」철학 중심 내용이 있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심신(心身)과 천인(天人)이 서로 나누어지지 않는 일체성과 조화성을 말하는 것으로 곧「한」의 철학 사상인 것이다.

「한」철학의 중심인「한」은 존재론에서 천지 만물의 근본적 실재로서 시원적(始原的)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태권도의 수련은 바로「한」의 철학적 신체론으로 천·지·인 삼재 또는 삼극의 하나이며 「한」의 체계와 본질을 터득하는 것이다.

「한」사상은 조화성을 내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커다란 하나의 입장에서 다른 부분들을 포괄하고 있다.
태권도의 원리는「한」의 철학적 원리와 사상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어 모든 동작은 삼극 곧「한(하나)」으로 표현되고 변화(움직임)와 생성이 氣(힘)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삼극 곧 천·지·인의 형상인 원·방·각은 태권도에서 모든 동작의 근본으로 작용한다. 원(○)은 회전으로 행하는 氣, 방(□)은 서기 자세로서의 기저면, 각(△)은 팔의 형상으로 技이다. 이 셋이 하나이며 「한」으로서 하나의 완전한 동작을 이루게 된다.

태권도 동작은 만물의 형체와 자세, 접촉과 상호 작용들의 효율적인 기술을 말하며 인간과 우주의 일치성을 반영하는 자연적 상징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렇듯 태권도의 기술 체계는 우주론적 체계(cosmology)와 상응성(homology)을 지니고 있다.
태권도에서 ' · '은 모든 방어(陰)와 공격(陽)에 있어서 기술(技)과 힘(氣)의 회전 원리이고, 'ㅡ'은 안정성이며, 기저면으로서의 목표선인 'ㅣ'은 인간의 생명선인 척추로서 중심선을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이 태권도의 동작은 동작의 정지 상태인 ○·□·△ 의 품에서 살아 움직이는 동적인 동작인 '·', 'ㅡ', 'ㅣ'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한」의 철학적 신체론이다.
태권도는 무도로서 구체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체험하는 것이고 그 신체의 움직임은 마음과 몸이 하나인 상태로 일체성에 초점을 둔다. 이 일체성의 뿌리가 바로 전체적 하나라는「한」으로 태권도의 기술 체계는 삼극(천·지·인)의 유형화된「한」의 원리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태권도를 연마한다는 것은 우주론적 체계인「한」의 원리와 철학적인 원리로서 「한」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태권도의「한」철학은 「한」의 주체로서 소우주인 인간이 대우주인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태극( )에서 출발해 마지막으로 길상만덕(吉祥萬德)의 상징인 일여 품새에 이르는 전과정을 우주적 차원에서 파악하려는 것이다.

한민족 상고 무예의 특성은 '氣'가 무예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 氣는 원래 神과 가깝다. 고동영의『한국 상고 무예사』를 보면 "사람이 기에 깊숙이 동화되면 영지(靈智: 영묘한 지혜)가 트이고 영계(靈界: 정신 또는 그 작용이 미치는 범위)와의 소통이 이루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누구나 단전 호흡이나 명상 또는 기공 수련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잠재 능력의 개발이 가능하며, 氣로 말미암아 초능력도 행할 수 있다. 무도에서 말하는 '氣'는 사기(士氣), 기력, 원기 등의 힘을 지칭하고 '技'는 기예, 기능, 기술 등으로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뜻이다.

氣와 技는 心身, 陰陽, 動靜의 원리로 서로 작용하고 상호 보완성이 충족될 때 이 두 기의 위력은 엄청나며 순발력, 민첩성, 파괴력 등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흔히 "그 선수는 힘(氣: 체력)은 넘치는데 技(기술이나 속도)가 모자라고 느려서 고배를 마셨다" 또는 반대로 격파나 품새 시연을 할 때 "그 선수는 技는 좋은데 氣가 약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 두 기(氣, 技)는 태권도의 기본 동작과 힘의 구성 원리로 깊숙이 작용하고 있다.

무도가 추구하는 것은 '사람은 땅의 원리를 본받고 땅은 하늘의 원리를 본 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이다. 천인합일이란 마음(자연)과 손발(인체의 표상)이 서로 맞는 의미에서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상이다.
이러한 비이원론적 신체관을 가진 한민족 사상은「한」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태권도의「한」원리가 구명(究明)되는 것이다.

태권도 기본 동작은 천·지·인 삼극의 기하학적 도형인 원·방·각(○·□·△)의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쉽게 즐겨 해왔던 가위 바위 보 놀이에서 천은 바위(주먹)로, 지는 보(손바닥)로, 인은 가위로 표시된다. 이를 태권도 용어로 손의 형상에서 풀이해 보면 ○은 주먹·등주먹·메주먹을 의미하고, □은 바탕손·손날·손날 등을 의미하며, △은 아귀손·손끝을 상징하고 있다(이경명, 1997).
이와 같이 손의 여러 가지 형상은 천 지 인 삼극의 기하학적 도형을 의미하는데 간단히 우주론적 기술 체계를 바탕으로 가공할 위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태권도 기본 동작은 이「한」철학의 원리에서 구성되고 풀이될 수 있다.

삼극의 원리에서 신체는 (○), 아랫도리 (□), 몸통 (△)으로 구분되듯 태권도도 수련에서 공격의 목표도 얼굴, 몸통, 아랫도리로 구분된다. ○은 회전의 원리와 집중력으로, □은 서기(기저면, 안정성)로, △은 각운동의 원리(근육 작용, 동작 형태)로 완전한 「한」 동작을 이루어 동작(기술 체계)을 할 때 움직임(수련)의 강동에 따라 氣(힘)가 나타난다. 이는 「한」철학적 원리로서 태권도의 실체이다. 예를 들면 지르기를 할 때 주먹은 허리에서 목표를 향해 원운동을 하며 나가는데 이때 회전의 원리로서 기를 배가시킨다.
원·방·각(○·□·△) 삼극은 「한」동작을 낳고 음과 양이라는 두 氣가 작용함으로써 생상되는 것이기도 하다. 동작의 형세는 자연의 형태(○·□·△)를 모방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변화와 그 내재된 생명의 기세(氣)를 표현한다.
「한」이란 모든 변화와 다양함을 내포한 근원적인 '일(一)'이고 그 근원적인 일에서 각종 다양한 동작이 생겨난다. 여기서 말하는 氣의「한」원리는 동작의 구성 원리 곧 묘합(妙合)의 원리로 회전의 동역학이라는 다양성의 통일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氣의「한」원리에는「한」철학에서 일컫는 현묘지도(玄妙之道: 몸을 사된 것과 접하지 않고 숨을 고르게 쉬어야 한다는 가르침)의 정신이 담겨 있다.

태권도 동작과 신체의 역학적 원리는 천 지 인 삼극의 형상인  '·', 'ㅡ', 'ㅣ' 곧 점·면·선으로 풀이되는 실재의 원리를 담고 있다. 기(技)의「한」원리란 중심선의 고저(高低), 기저면의 장단(長短)에 따른 역학적 에너지를 말한다.
신체의 역학적 운동 원리로서 '·'은 회전과 원운동, ㅡ'은 기저면과 목표선, 'ㅣ'은 신체에 있는 생명(生命) 중추(中樞)로서의 생명선과 중심선에 해당한다.

태권도에서 말하는 안정성과 물체의 안정은 매우 다르다. 태권도에서는 수련을 하거나 실제로 겨루기를 할 때 상대의 대응에 즉시 자세의 변화를 나타낸다. 중심선이 기저면을 벗어나면 즉시 발을 옮겨 기저면을 재구성하게 된다. 겨루기는 '기(氣)'와 '기(技)'의 맞대결로 결국 상대방의 중심을 흐뜨러 놓는 것과 관계가 깊다.
일반적으로 기저면이 좁고 무게 중심이 높은 인체는 겨루기에서 불안정하나 힘과 속도의 운동 측면에서는 바람직한 자세라 하겠다. 그러나 발차기 같은 연속 동작에서는 도리어 기저면을 벗어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연속차기의 직선 운동에서는 빠른 가속도를 내기 위해서 무게 중심이 반드시 기저면을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게 하여 넘어지기 전에 다음 발을 내딛어 새로운 기저면을 형성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러나 품새에서는 안정성을 위해 기저면이 넓고 중심선이 낮아야 한다. 반대의 경우로 차기에서는 한 발로 기저면을 이루고 다른 한 발로 차는데 이때 각운동과 중심선을 높아야 효율적이다. 이 모든 원리가  '·', 'ㅡ', 'ㅣ' (천·지·인)의 삼극 사상이 태권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한」의 철학적 우주론이며 기(技)의 「한」원리이다.
품새는「한」철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손과 발의 기술 체계인 서기, 막기, 지르기, 차기 등 공방(攻防)의 기법을 일정한 틀로 하여 구성된 학습 체계이다. 품새는 태권도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데 심신 수련을 통해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부단한 인내와 수련을 요구한다.
품새의「한」철학 원리를 이해하고 수련하는 과정에서 심미적 예술성에 탐닉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품새는 심신의 조화로운 활동을 위한 철학적 행위 예술이라 정의할 수 있다.

품새라는 용어는 '품'과 '새'의 합성어로서 순수한 우리말이다. 품은 불완전 명사로서 동사 밑에 붙어서 그 동작이나 모양 또는 됨됨이 등을 나타내는 말이며 새는 모양새, 맵시, 꼴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품은 동작이 끝난 상태의 정적인 의미이고 동작은 개체의 동적인 의미를 말한다.

품새라는 용어는 1987년 2월 26일 국기원 기술심의위원회에서 개정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형(型)' 또는 '품세(品勢)'라 일컬었다. 현재의『품새』는 대한태권도협회 연구분과위원회 소위원회가 제정했다.

품새는 태권도 수련 과정의 주된 학습 과제이며 승단 심사를 할 때 학습 평가 기준에서 60%를 차지하고 있다.

품새는 모두 25개로 분류되는 데 팔괘 품새(1∼8장)를 제외한 태극 품새(1∼8장)와 유단자 품새로 고려(高麗), 금강(金剛), 태백(太白), 평원(平原), 십진(十進), 지태(地跆), 천권(天券), 한수(漢水), 일여(一如)를 포함한 17개의 공인 품새가 전세계에서 학습되고 있다.

지도자의 교시에 따라 자기 급수에 해당하는 품새를 단계별로 습득해야 하는데 하나의 품새를 자기화하자면 많은 연습을 해야 한다. 이러한 품새 수련을 통해 전신의 근육과 관절을 고르게 발달시키는 운동 효과를 얻게 되고 균형, 집중력, 호흡 조절, 동작의 정확성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품새 수련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핵심은 각 품새의「한」철학 정신과 원리를 이해하는 일이다. 철학 정신과 원리를 이해한 다음에 수련을 해야 연습에 큰 도움이 되고 생명력이 넘치는 동작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품새는 모든 품새선이 좌우 진행 방향에서는 동작의 대칭성을 보여 주고 선후 선상에서는 동작의 조합이 다양성과 역동성을 보여 주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시작과 끝남이 준비서기에서 준비서기로 귀의하여 일치성과 순환성을 보여 준다.

품새란 공격과 방어의 기술을 규정된 형식(틀, 형)에 맞추어 지도자 없이 수련할 수 있도록 이어 놓은 동작으로 태권도 정신과 기술의 정수를 모아 심신 수양과 공방 원리를 직접 또는 간접으로 나타낸 행동 양식이다.

품새는 태권도의 진수이고 겨루기나 격파에 우선한다. 따라서 품새는 '각 품새선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성을 바탕으로 호신과 심신 정련의 합목적성을 구현하는 품이면서 동작의 한마당'이라 할 수 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1968년 팔괘 품새(8개)와 고려부터 일여까지 9개를 포함하여 17개 품새를 제정했고, 1972년 기술심의회는 다시 '품새와 용어의 제정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학교 교과 과정에 삽입될 새로운 품새인 '태극'을 1장에서 8장까지 제정하여 총 25개의 품새를 완성했다.
태극 품새에 앞서 먼저 제정·보급하여 시행되었던 팔괘 품새는 태극 품새의 제정으로 사실상 사장된 상태이다.

태권도에 입문하게 되면 예시예종(禮始禮終)의 정신을 바탕으로 기본동작을 익히게 되고 다음으로 태극 품새를 수련하게 되는데 태극 품새는 유급자용 학습 단원으로 부단히 배우고 닦아야 하는 태권도의 진수이다.
태극 품새란 우주의 근본을 뜻하는 음양의 팔괘선을 따라 동작을 구성한 것으로 한민족 태극 사상의 5대 정신인 평화, 배달, 창조, 광명, 무궁이 담겨 있다. 주로 자연을 주제로 한 유단자 품새에는 단군의 사상, 홍익 인간의 사상, 십진 사상, 음양 사상 그리고「한」사상이 함양되어 있다.
태극 품새는 팔괘의 표자(表字)에 따라 건, 태의 순서로 방어와 공격, 리듬, 완급, 힘의 강약, 난이도(동작), 기합의 배치 그리고 전후좌우의 구성과 진행 등 다양한 동작에 의한 신체 활동을 음양의 원리로 변화무쌍하게 반복 수련함으로써 기술 습득과 함께 자기 확신을 터득하게 되는 행동 철학이다.
태극 품새에서는 동작의 구성과 난이도 등을 감안하여 태극 1장은 건괘, 2장은 태괘 등의 순이 되어 태권도의 단, 급수의 구분과 일치성을 나타낸다. 초심자는 무급에서 심사를 거쳐 8급에서 1급으로 하향 진행되고, 그 다음 마스터의 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초단에서 입신의 경지라 일컫는 9단으로 상향 진행되는데 이 때 8개의 태극 품새와 9개의 유단자 품새 수가 맞아떨어진다.

인간의 생명은 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로운 것이다. 하늘(天=乾)에서 내려와 땅(地=坤)에서 활동하다 그 명(命)이 다하면 다시 하늘로 귀의한다는 동양 사상의 흐름은 인간 생명의 근원을 잘 보여주며 동양인의 일상적 철학성과 종교적 심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태권도는 국위 선양의 기수로 큰 몫을 수행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 상징인 태극기의 태극 사상이 유급자 학습 단원인 태극 품새의 철학성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주역 사상은 동양 철학의 기본 요체로 그 주역 사상에 연유하는 태극기를 가진 우리 민족은 철학을 가진 나라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태권도는 애국과 애족의 사상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평화, 배달, 창조, 광명 그리고 무궁의 정신으로 수련자는 우리 국기를 상징하는 태극의 5개 정신을 함양하여야 한다. 국내외 한인 사범은 물론이려니와 서양의 수련자도 국기에 대한 예(禮) 곧 예시예종의 정신에서 태권도의 예술적인 행동 철학에 매료되어 신체를 연마하고 있는 것이다.

유급자 품새에 이어 유단자 품새에서도 그 품새를 특징짓는 품새선이 있고, 품새명과 그에 상응한 품새선 및 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국기 태권도 교본』에 의하면 고려 품새는 '선배를 의미하며 선배는 강력한 상무 정신과 곧은 선비 정신을 나타내고 고구려, 발해, 고려로 이어지는 선배(선비)의 얼을 바탕으로 품새로 엮어졌다'고 한다. 이와 연관지어 볼 때 고려 품새의 품새선은 사(士)자가 된다. 문교부서 발행한 『태권도』에 고려 품새는 '어느 민족보다도 창조심이 강했고 극치에 달한 문화 예술을 가진 민족으로서 태권도의 종주국임을 자부하고 고려인의 기개를 높여 민족 정신을 모아 품새로 구성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태백 품새에 대해서는 『국기 태권도 교본』에 '태백은 한민족의 고대 국가인 단군 조선이 개국한 아사달(아씨땅)의 성산인 붉메(밝산)를 의미하며 밝은 산은 얼과 전통의 근원인 신성함을 그리고 홍익 인간의 사상을 나타낸다. 태백은 수없이 다른 위치와 말로 나타나있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민족의 태반(胎盤)이고 상징인 백두산이며 단군의 높은 이상을 바탕으로 품새가 생겨났다'고 설명되어 있다.
현재 품새 체계에서는 고려가 태백보다 먼저이다. 그러나 태백 품새의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로 볼 때 단군 신화에서 개국을 의미하는 태백 품새가 고려 품새에 우선이어야 하고 동작의 구성과 난이도 등을 볼 때도 품새의 차례는 마땅히 태백이 고려 품새에 우선해야 할 것이다. 실제 지도 수련 과정에서도 고려 품새가 훨씬 난해하다. 태백은 옛말로 백두산을 의미하고 단군 개국 신화의 근원지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하느님(桓因)의 아들인 환웅이 부하 3천 명을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곳이 태백산이라고 되어 있다. 그 태백산은 『삼국유사』에는 오늘의 묘향산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곳이 백두산이라는데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단군 신화는 하늘(·)과 땅(ㅡ)그리고 사람(|)의 사상이 화합하는 것으로 음(땅)과 양(하늘)이 결합하는 사상이 단군의 탄생을 둘러싸고 잘 정리되어 있다. 따라서 태백 품새의 품새선은 공(工) 자이며 천 지 인을 반영하는 단군 개국 신화를 상징하고 있다.
태권도의 종주국이 한국이고 태권도 단 품새에 있어 단군 개국 신화를 상징한 태백 품새를 맨 먼저 내세우고자 하는 근거와 바로 여기에 있다.

금강 품새는 한국의 명산이고 불교의 성지라 할 수 있는 금강산을 상징행 산(山)자형 품새선을 정했다. '금강'은 사전적으로 금강산의 준말이며 단단하고 현란한 광채를 발하는 금강신을 의미하기도 하고 『금강경』에서는 금강신 등의 의미가 있다. 『금강경』에서는 금강석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금강은 그 어떤 물건이라도 능히 깨뜨릴 수 있어도 또 그 자체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부서지거나 상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으로 오히려 인드라신이 가지고 있는 바지라라는 뜻인 것 같다.
아무튼 악마를 물리치는 금강신이나 경주 석굴암의 금강역사상에서 딴 금강막기 품(동작)과 금강산에서 산(山) 모양을 딴 산틀막기 품이 금강 품새를 이루고 있다. 이 품새선이 보여 주듯이 탄탄한 기반으로 안정을 이루면서 예리하고도 변화 무쌍한 강도와 절도를 나타내고 있다.

평원 품새는 평탄한 들판 곧 큰 땅(ㅡ)에서 푸른 창공을 바라보며 화평과 광명, 희망을 표상으로 하는 표현인 겹손 준비서기로 이어진다. 이 품새는 '땅이 삶의 시작과 근본인 것같이 인체에서 힘의 근원인 하단전에 기운을 모으고 얻어서 행동하기 위한 서기'로 평원은 본디(本)와 바뀜(用)을 뜻한다.

십진 품새는 자연 숭배와 원시 신앙에서 나오는 장생불사하는 열 가지 물건 곧 십장생(해, 산, 물, 돌, 소나무, 달, 불로초, 거북, 학, 사슴)과 수학의 10진법에서 무한대로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음과 양의 결합을 내포하듯 품의 구성 변화가 다채롭다.

지태, 천권 품새에서 지(地)는 음(ㅡ)이고 천(天)은 양( )이니 품새선으로 지태는 (┷)표자, 천권은 (┯)표자인데 몇몇 교본에서는 출발점이 반대로 되어 있어 오류를 범하고 있다.
지태 품새는 지표에서 하늘을 향해 사람이 서 있는 모습으로 땅에서부터 솟구치듯이 움직이는 동작의 형태를 주로 적용하였고, 천권은 그와 대조적으로 독수리가 내리는 듯 날개펴기, 밤주먹 솟음치기 등 특징 있는 동작이 많다. 지태는 땅 위에서 선 사람과 땅 위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사람의 모양으로 땅에서 나고 자라며 죽는 사람과 그 땅을 뜻한다면 천권은 하늘에서 내리는 사람, 하늘의 뜻에 의한 사람, 하늘로부터 힘을 받은 사람, 하늘을 숭상하는 사람인 하늘 사람이란 뜻과 하늘과 사람이란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

한수 품새는 큰 강을 뜻하고 그 성분인 물은 바로 만물의 생명을 키워 주는 근원으로 품새선은 수(水) 자형을 응용하였다.

마지막으로 일여 품새에 대해 『국기 태권도 교본』에서는 "신라의 위대한 승려, 원효대사의 사상 정수를 의미한다. 원효 사상은 마음(정신)과 몸(물질)이 하나이면서 …(중략)… 나아가 정신과 동작이 일체가 되는 깊은 무예의 진리가 바탕에 깔려져 있는 품새"로 설명하고 있다.
일여 품새의 품새선인 만(卍)자형의 의미는 불교에 나타나는 길상만덕의 상징이며 석가가 태어날 때부터 가슴 복판에 있었다는 표시이기도 한 불교의 상징 문양이다. 우리 나라가 불교 문화권에 속하고 전체 품새의 이름이 자연계와 깊은 연관성이 있는 자연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인간은 자연(물질인 육신)이 정신(마음)과 화합하는 선불교의 경지로 몰입하게 된다.
태권도의 마지막 수련 단원인 일여는 선(禪)과의 관계 속에서 정신과 육체의 통합을 강조한다. 이는 선 수행을 통해 누구든 의식 상태의 변화를 이룰 수 있으며 태권도에 있어서 도를 의미하는 고차원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영원한 것 곧 역(易, 변화)의 중심점을 이루고 있으면서 변하지 않는 태극(일여 사상)을 추구하고 수련 연마하는 과정이 품새의 요체이고 이것이 바로 태권도의 무예적 철학성이다.

유단자 품새의 절정을 이루는 아홉 번째의 일여에서 그 시작과 끝 동작이 막기로 끝나는 것은 태권도가 역시 호신의 무예임을 나타내고 있다. 아홉 개의 품새에서 9라는 수의 의미는 자못 심원하다. 이 9수는 동양적 사고 체계에서 양(陽)의 기운이 충만한 수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높다, 길다, 많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일상적으로 넓은 하늘을 뜻할 때 구천(九天)이라 하고 깊은 마음속을 구곡간장(九曲肝腸)이라 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경우를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 표현한다. 또한 사람이 죽어 미지의 세계인 '구천구만리장천'으로 떠난다는 종교적 의미도 담고 있으며 우주에 있어 '9방축' 등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태권도인은 수련의 심도가 깊을수록 겸허해지며 숙연하게 자세를 가다듬고 선구도적이며 철학적인 심신 수련에 정진해야 할 것이다.

태권도를 비롯하여 유도, 검도, 합기도와 같은 동양 무술을 동양 사상의 핵심 단어인 '도'와 결부시켜 무도라고 부르고 있다. 도는 노자·장자 사상으로 대표되는 도가(道家)의 중심 사상이기도 하고 불가와 유가에서도 널리 쓰인다.
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으로 노자는 도를 우주의 근원이며 시원이라 하였다. 도는 무형의 신체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 정신론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말할 수 있는 도는 신체적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한비자(韓非子)』의 「해로편」에서 '도는 만물의 근원이고 모든 도리의 비방(秘方)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말에서 道의 어원은 '돕다'와 그 어원 체계를 같이 한다. 유가의 『사서오경(四書五經)』전부가 도와주고 도움 받는 道의 사상 체계이므로 道는 돕다와 그 말뜻이 근본적으로 같음을 알 수 있다.
유가 경전 곳곳에서 해치고 죽이는 것은 '비도(非道)'라 하고 있고 道가 행해질 때는 '천하유도(天下有道)', 道가 행해지지 않을 때는 '천하무도(天下無道)'라 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이렇게 볼 때 道는 곧 단군 사상의 핵심인 홍익 인간의 도이다. 단군의 홍익 인간 사상은 '사람을 크고 넓게 도운다'는 뜻으로 이는 바로 도를 의미하는데 인간이 인간다운 숭고한 정신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함을 뜻한다.
동양 사상에서 인간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별개의 존재가 아닌 통합된 전체라는 심신일원론적인 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출발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태권도를 수련할 때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결국 마음(정신)과 몸을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이다.
즉, 무도적인 태권도의 개념에는 심신이 하나가 되는 심신일여(心身一如)사상과 동정일여(動靜一如)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본능에서 출발해 자발적이며 능동적으로 심신일여를 성취하여 자기의 몸과 마음 수행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려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태권도는 태권도와 도의 만남은 시작부터 완성까지 이어져야 한다. 태권도와 도는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인 것이다. 태권이 몸(신체)이라면 도는 일상의 정신이자 마음이고, 태권이 동(動)이라면 도는 정(靜)에 해당된다. 신체는 가시적이나 정신과 마음은 불가시적 대상이어서 태권이 형이하학적 개념이라면 도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그리고 태권이 포괄적인 실천 행위라면 도는 그에 대한 직관이다. 그러므로 태권도 수련은 대내적 직관(마음)과 대외적 실천(몸)을 요구한다.
태권도는 수련을 통해 심신의 여러 기능을 평균적으로 정상 수준에서 정상 이상의 수준까지 높여 가는 작업을 통해 인격의 향상과 완성을 지향한다. 이것이 바로 도의 실천적 행위이다. 태권도에서 도가 의미하는 모든 길은 심신의 여러 가지 능력을 인격의 완성이라는 도정(道程)에 연결하는 것이다.
태권도에서 도의 철학성은 손발의 기술 체계를 수련하거나 겨루기 등과 같이 심신의 경험을 통해 행위적 직관으로 규정할 수 있다. 태권도는 무도로서 자연과 조화하고 합일하여 정신적 집중력으로 자아 통찰과 심신합일을 지향한다. 또 신체의 전체 부위를 순리에 따라 연마하는 동양적인 자기 체험의 자각 교육이며 전인 교육이다.
태권도와 같은 동양의 운동 형식에 있어서 주된 요점은 스스로 수행하는 '체험'에 있다. 신체를 단련하거나 경기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련 활동 속에서 스스로 삶을 만기하고 존재의 내면에 깊숙이 파고들 수 있는 행위 곧 직관에 몰입할 때 태권도의「한」철학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태권도 무도복은 바지, 저고리, 띠로 구성되어 삼극을 이루며 하나를 뜻하는 「한」이며 한 벌이라 불린다. 도복은 한국의 고유 의상인 한복과 유사한 점이 많은데 한복이 한민족의 고유 의상으로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삼국사기』「신라조」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대한 한복 바지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바지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삼국이 모두 바지를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송나라 서긍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구려 조의선인은 흰 모시옷을 입고 허리에 검은 비단을 둘렀다'는 글이 있는데 이것이 고구려 조의선인의 옷 모양이다. 지금의 도복 역시 고구려 무인들이 입었던 조의선인의 옷과 별로 다를 것 없이 흰옷에 띠를 맨다. 기다란 윗저고리에 바지 역시 옛 삼국시대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한민족 고유의 옷과 거의 같다.

한복의 재단법과 유사성을 지닌 태권도복은 바지저고리의 형태로 볼 때 ○·□·△의 세가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실례로 바지에서 허리는 ○로 마루폭은 □ , 그리고 사폭은 △의 꼴로 되어 있고 저고리에서도 같은 꼴을 찾아볼 수 있다.

도복이란 원래 다른 복장과 달리 모양이 잘 바뀌지 않는 보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조의선인이 입었던 옷과 고조선의 국자랑들이 입었던 옷이 별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의 조의선인과 신라의 국선 화랑을 고조선의 전통이 이어져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 때 무예를 익히던 젊은이들인 국자랑이 삼국시대로 이어지면서 고구려의 조의선인과 신라의 화랑이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원은 하늘을, 방은 땅을, 그리고 각은 사람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때  원·방·각(○·□·△)은 천·지·인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 세가지 꼴의 원·방·각이 『삼일신고』에서는 만상(萬象)의 근원이 된다고 했고, 한복 바지 저고리가 원·방·각의 세 모양으로 만들어진다 함은 만상의 꼴을 상징화해서 이 세 개의 삼극이 하나 곧 「한」이 되는 것이다.
『천부경』의 수 개념을 적용해서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의 원리가 바지저고리에서 각기 제 위치를 차지해서 한복의 형태가 완전하게 형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복의 형태와 원리로 볼 때 유사성을 지닌 도복의 역사도 한복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맥의 음양 원리에서 사람을 우주에 비하여 소우주라 하고, 음에 해당하는 바지는 땅이고 양에 해당하는 저고리는 하늘 그리고 띠는 사람으로 천. 지. 인의 삼재 사상과 맞아떨어진다. 삼재 사상이 치마, 저고리, 바지뿐만 아니라 두루마기, 장옷 등 모든 의식주의 구조와 생활 용구에도 바탕을 이루고 있어 한민족사의 맥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원래 태권도복은 흰색의 천으로 만들어져 애용해 왔는데 1978년 7월에 유급자, 품 그리고 유단자 도복으로 구분하고 공인 도복으로 지정하였다. 품 도복은 저고리 깃에 빨강·검정 두 색으로, 유단자 도복은 검정색 깃으로 구분되고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
도복 색깔의 시원은 우주의 본체가 흰색이고 만물의 근원 또한 흰색으로 보아 한민족 자연 철학 사상이 우주를 본체로 하는「한」곧 하나에서 시작되었고「한」은 '희다'에서 유래된 것이며 '희다'는 다시 우주의 본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도복의 색이 흰색인 것은 우주의 본체가 흰색이고 만물의 근원 또한 흰색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태권도에서 도복이 의미하는 철학적 무예성은 도복을 청결히 간수하며 심신을 갈고 닦는 도의(道衣)로서 중시하는데 있다.

태권도에서 띠는 바지·저고리와 함께 한 벌의 도복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도복이 유급자 띠로 각각 구분되어 역시 사극을 이루고 있다.
한민족은 하늘(양) 땅(음) 사람의 삼재 중에서 하늘과 땅의 요소를 사람으로 집약하였다. 태권도복에서 저고리는 하늘, 바지는 땅에 해당되고 띠는 이 두 개념을 포함하여 우주라 하는데「한」철학에서는 사람을 소우주라 일컫는다. 도복은 전체적으로는 정적인 면이 강하며 띠는 이 도복의 중심에 동적 요소인 역동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띠의 색상은 다섯 가지로 구분되어 있는데 초보자의 흰색, 유급자의 노랑 파랑 빨강과 유단자의 검정색이다. 삼극적 원색은 노랑 파랑 빨강이고 흰색과 검정색은 해와 달, 낮과 밤, 시작과 완성 등 음양을 상징한다. 이 다섯 가지 색상의 의미는 음양 오행의 원리로 인식되고 있다. 오행은 수, 화, 목, 금, 토를 말하며 천지의 생성 원리이다. 소우주인 인간은 몸 안에 오장육부(五臟六腑)를 갖고 있다. 오장에서 오행이 나왔고 신장(수), 심장(화), 간장(목), 폐장(금), 비장(토)으로부터 오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오행은 오방 곧 중앙(세상의 중심)과 동서남북의 다섯 방위를 말하고 이는 우리 나라의 전통 색깔인 오방색이라고 한다.
태권도에서 띠의 오색은 바로 우주의 원리인 오행, 오기(五氣, 오장)와 일치하며 이 오색은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전통 색으로 궁궐이나 사찰 등 건축물의 단청에서부터 복식, 민화, 포장지 등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태권도에서 띠가 상징하는 급과 단의 숫자는 시작과 완성이 아홉 수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하늘과 땅, 음양과 오행의 합수를 의미한다. 태권도를 수련하는 과정에서 색상의 변화 원리는 오행과 부합하며 다섯가지 색에 해당되는 인체내의 오기는 자아 자체가 우주적 기(氣)의 흩어짐과 모임의 끊임없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氣)적인 현상으로 생명소이다.

태권도인이 도복을 입고 띠로 단전 부위를 중심으로 두 번 단단히 두르는 의미는 음과 양이 만나는 기의 장소가 단전이기 때문이여 삼각꼴을 이루는 매듭의 각은 역시 사람을 상징한다. 이는 단전에 기를 모으고 적재적소에 기(氣)를 기(技)로 운용하자는 것이다.

띠는 도복에 견주어 우주를 상징하듯 실제로 태권도인은 도복을 몹시 조심스럽게 다루며 간수하는 예(禮)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따라서 태권도 수련은 엄격한 질서를 요구하며 그 질서는 바로 띠의 색상 차이로 권위와 상하 관계가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예를 바탕으로 변화하고 조화하여 질서를 이루게 된다.
태권도에 입문하면 흰 도복에 흰 띠로 시작하는데 흰색은 탄생 또는 시작 이전의 무(無)의 상태 곧 태극을 의미한다. 노랑은 탄생을 상징하고 파랑은 재상, 소생, 희망, 젊음을 상징한다. 초보자 수련에서는 흰 도복 바탕에 흰 띠부터 시작해 점차 노랑, 파랑, 빨강을 거쳐 마침내 검정 띠에 이르는 과정은 피땀 흘리는 고된 수련을 통한 원리에서 창출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띠는 태권도에서 오행, 오색, 오기에 의한 원리를 바탕으로 중요한 통과  의식을 상징하는 예장(禮裝)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포괄적 의미에서 바로 띠의「한」철학적 무도성을 찾아볼 수 있다.

Ⅴ. 태권도의 정신

태권도 정신은 우리 나라 전통의「한」사상을 근간으로 개별의 정신 하나 하나에는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또한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 수련 행위의 본질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수련자에게 바람직한 의미를 주고 있으므로 인간 세계의 커다란 가치를 제공한다.
태권도 수련의 결과로 인해 생성되는 인간 행위 속에 내포되어 있는 정신 세계는 무도와 스포츠의 태권도 틀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짜임새를 구조화하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태권도수련 ⇒ 평화정신, 애국정신, 예의정신, 충효정신, 부동심, 호연지기, 정신정신, 준법정신 ⇒ 태권도정신을 통한 자아실현, 인격완성

즉, 태권도의 가치는 수련의 결과로 생성되는 신체적 성장 발달과 더불어 정신적 발달을 도모하여 자아를 실현함으로써 인격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그 중 태권도 정신은 외적으로 표출되는 신체적 성장 발달과는 달리 인간의 내적 세계에 대한 형이상의 구조로서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므로 개개의 항목으로 구분하여 언어로서 표현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교육적 측면을 고려하여 굳이 태권도 정신을 세분화한다면 다음과 같이 논의 할 수 있을 것이다.

1. 평화 정신

「한」사상에 내포되어 있는 평화성은 전일(全一)적이며 타협적이다. 「한」의 평화성은 단지 폭력이나 투쟁이 없는 상태의 소극적인 의미를 벗어나 사랑과 인도주의를 기초로 하고 양극의 조화를 전제로 하는 적극적 의미의 평화이다. 그러므로 한민족이 예로부터 추구하는 평화의 정신은 인간의 고귀한 가치실현과 조화 속에 만물이 성장 발전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같은 한의 평화 정신은 분열, 대립, 이성(二性)을 허용치 않는 「한」의 정신에서 연유한 것이다.
단군조선 이전의 역사에 나타나 있는 환웅천왕과 풍백, 우사, 운사 사이의 군신간에 또는 단군신화에 나타나 있는 환웅과 웅녀 사이의 부부간에서 묘합의 상을 나타냄은 「한」의 평화성을 상징한 것이다.
한민족의 평화 정신은 태극기에도 나타나 있다. 태극기의 바탕은 순일무잡(純一無雜)한 민족의 동질성과 결백성을 상징한 것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정신이 한민족의 기질과 이상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고대 동부 제국들이 백의를 숭상한 것은 공통된 문화적 특징이나 위지 동이전 부여조에 보면 「나라 사람들이 횐 옷을 숭상해 입었으며, 상중에는 남녀가 모두 순백으로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색을 숭상하고 평화를 사랑한 것이 한민족의 특징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 문헌에서 한민족을 군자로 취급하고 깨끗한 민족으로 인정한 것은 일상생활에서 오는 여러 가지 갈등을 조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며 함께 경쟁을 벌이던 이민족과의 협조와 조화를 통해 슬기로운 삶을 보여줬기 때문이라 믿어진다.
한민족의 민요 속에는 투쟁적이고 살인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국민요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부분도 폭발하기보다는 웃고마는 체념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으니 이는 싸우지 않고 서로 양보하는 평화 애호의 사상을 낳게 하였다.  노동요중 모낼 때와 논매고 밭갈때 농악과 함께 농부들이 부르던 노래는 태평세월을 구가하는 노래의 극치이다.

   여바라 농부야 말들어라.
   아나 농부야 말들어라.
   먼데 사람은 듣기도 좋고
   가까운데 사람은 보기도 좋게
   북장구 장단에 심어보자.


이처럼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인정미 넘치는 평화사상이 주체화된 민요는 영미 민요의 무법자, 싸움, 파괴, 살인 등의 투쟁적인 주체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권력의 통치는 폭력과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화해의 일치감에서 이룩되어야 한다는 평화사상에서 비롯되었으니 평화와 자유의 정치 문화에서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정치이념이 나온 것이다. 즉, 재세이화, 이도여치, 광명이세, 금척의 현묘지도는 조화와 융화를 바탕으로 하는 평화사상의 실현으로서 소아를 버리고 대아정신에 살으려는「한」의 사유인 것이다.

태권도의 도복이나 수련의 상황은 평화 정신을 상징하는 내용이 다분이 포함되어 있다. 태권도에 입문하면 흰 도복에 흰 띠로 시작하는데 흰색은 탄생 또는 시작 이전의 무(無)의 상태 곧 태극을 의미한다.
도복의 색깔은 본래 우주의 본체가 흰색이고 만물의 근원 또한 흰색으로 보아 한민족 자연 철학 사상이 우주를 본체로 하는「한」곧 하나에서 시작되었고「한」은 '희다'에서 유래된 것이며 '희다'는 다시 우주의 본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도복의 색이 흰색인 것은 우주의 본체가 흰색이고 만물의 근원 또한 흰색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태권도의 도복 그 자체는 평화의 상징이다.
이렇듯 태권도에서 도복이 의미하는 철학적 무예성은 도복을 청결히 간수하며 심신을 갈고 닦는 도의(道衣)로서 중시하는데 있다. 따라서 태권도는 평화를 사랑하는 한민족의 무예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2. 애국 정신

나라의 상징인 국기는 우리 겨레의 얼과 정신이 담겨있는 것이며, 긍지, 용기, 희망을 가져다준 정서 어린 표상인 것이다. 우리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태극기는 일제에 항거하여 싸울 때 겨레의 가슴에 품어 간직되기도 하고, 피에 물들여지고 총칼에 찢기기도 했으며, 우리가 국제 경기에 우승하여 하늘 높이 휘날리는 태극기는 우리 겨레 모두가 자랑과 긍지와 보람을 느끼게도 하고, 용기와 희망으로 벅찬 감격을 느끼게도 하였다. 국기는 우리 모두에게 눈물과 기쁨을 주는 정서 어린 표상이다. 국기를 소중히 여기고, 국가(國歌)의 뜻을 마음깊히 되새기는 것은 국가정체감(國家正體感)과 민족일체감을 갖게 하며 온 겨레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결속하게 하는 애국 정신의 바탕이 되며, 서로 신뢰하고 협동하는 마음가짐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태극기의 사랑은 애국심의 발로이다.
우리 나라의 어느 태권도장이던지 들어가보라. 도장의 정면 중앙에 태극기가 없는 도장이 있는가?
또는 태권도를 수련하는 약 150개 국가의 태권도 인구를 총 5천만명으로 추산할 때 세계 각국의 그 수많은 도장에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은 도장이 있는가?
태권도를 교육할 때에는 태권도 예의 정신의 발로로서 운동의 시작과 끝에 반드시 태극기에 대한 예를 행하고 있으며, 외국의 경우에도 반드시 우리의 태극기와 자국의 국기에 대한 예를 행한다. 태권도장이 아니라면 어느 무도나 어느 스포츠가 이러한 애국 정신을 보다 크게 함양시킬 수 있겠는가?
어느 무도가 태권도만큼이나 국위를 선양하고 있으며, 조국을 떠나서 생활하고 있는 교포들에게 태권도가 얼마나 많은 자긍심을 일깨워 주고 애국 정신을 상기시켜주고 있겠는가?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태권도가 아니었더라면 과연 외국인들이 태극기가 우리 나라의 상징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 것이며, 과연 어떻게 우리의 태극기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할 수 있었을 것인가?
태권도야말로 그 어느 무도나 스포츠보다도 애국 정신을 고양시키고 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태권도의 어떤 동작을 수련함으로써 애국 정신이 고양된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지만 태권도 수련의 단계에서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에 대해 행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와 같은 선서나 예(禮)를 통해서 애국 정신이 자연스럽게 함양되는 것이다.
또한, 태권도를 통해 함양되는 태극기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민족과 국가를 위한 애국 정신의 바탕이 되기도 하지만 민족일체감 형성의 정서적 기반이 되며, 온 겨레로 하여금 화합하고 결속하는 협동 정신의 발로가 된다.

태권도를 통한 진정한 애국 정신은 태권도를 하는 사람이 나라를 위해 개인으로 하여금 희생하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태권도 수련을 통하여 각자 스스로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확인하고 자신의 귀중함을 인식하며, 자신의 삶과 일에 보람을 느끼고 긍지를 가지며, 자신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높이고, 맡은 바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3. 충효 정신

한민족은 예로부터 忠孝를 전통적 생활 윤리로 지켜왔다. 본래 효 윤리는 한민족 사회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도덕 감정에 기초한 가치 덕목으로서 사회 관계의 시원이며 민족 고유의 생활 감정이고 인륜 관계의 핵심이다.

한민족의 윤리 사상을 일관하여 오고 있는 효 윤리의 사상적 토대는 「한」의 대아 정신이다. 「한」의 대아 정신은 나의 이익보다는 남을 위하여 정신을 앞세우며 나와 남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것이다. 즉 서구의 사상이 주체와 객체의 투쟁에서 진리를 획득하여 왔다면 우리의 「한」사상은 주체와 객체가 융합되어 얻어진 하나의 정신일 수 있다.
따라서 한민족의 효 윤리는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분리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큰 하나로 인식하였으며 자기를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선(善) 실현의 가치 덕목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의 부모에 대한 효도는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가장 강렬한 애정을 동반한 원초적인 인간 관계일 뿐 아니라 절대적인 결합 관계로 인식함으로써 본심에서 나오는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효를 실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도덕 사상은 「한」에서 비롯된 것이다. 너와 나를 초월하여 차별심이나 분별심을 가짐이 없이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한」의 정신이 효 윤리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효의 윤리 사상은 물질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을 균형 있게 조화시키는 것으로 「한」의 내면성인 조화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한민족의 전통 사상인 천인합일적 조화의 패턴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유교에서처럼 인간의 주체적 자아 의식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간의 개별성을 인정하고 있어 각자의 주체적 책임 의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버이는 마땅히 인자해야 하고 자식은 마땅히 효도해야 하는 것이다. 단군 개국신화에 나타난 부자 윤리의 전형적인 구조는 부자(父慈) 자효(子孝)의 구쌍무적 호혜 윤리로 나타난다.

孝의 개념은 소승적인 것이 아니라 대승적인 개념으로 확대되는 것으로 친애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사람과 공존하는 사회 윤리의 영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공익과 협동 그리고 질서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사회 연대의 주축이 되는 것이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고 전체의 복리를 위하여 소아를 버리고 다수의 행복 실현을 위해 협조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효의 윤리인 것이다.

나와 국가 또는 민족을 불가분의 관계로 생각하고 공동 운명체라는 인식에서 선을 실천하는 충효 윤리는 처음부터 대립과 분열을 허용하지 않고 커다란 하나로 지양할 수 있는 상대적인 곳에 참선이 있다고 보는「한」의 선악관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민족의 효의 윤리가 전체만을 위주로 하고 개인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사상과는 다르다. 전체주의에서는 전체와 개인간의 관계, 나를 위한 상대의 관계로서 의식이 정립되는 공동체 정신과 직결되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 집착하지 않고 상대성을 초월한 전체성을 주요시하는 한민족의 효 윤리이기는 하나 결코 개인의 주체성을 소멸시키고 자주성을 둔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상실하기 위해 타인 속으로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기의 존재를 생겨나도록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효 윤리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는 하나의 정적인 융합체로서 이익 공동체와 운명 공동체의 사회를 지향하게 되며 공익 우선과 협동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사회 구성원간에 정신적인 유대로 전체가 하나로 이루어질 수 있어 공익을 앞세워 서로 협동하는 사회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가장 충실히 따른 것이 대아를 위해 소아를 버리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오계(五戒)의 주요 덕목이 충효였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개인이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곧 효를 행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孝의 실천이 忠의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충(忠)은 中과 心(中+心), 즉 마음에 중심이 잡혀있다는 뜻이다. 즉 스스로의 주체적 중심을 잡는 데에서 시작하여 개체의 책임성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忠이 있는 인간은 책임성이 강한 인간이며 주체적 중심을 가진 인간으로서 거짓이나 불의나 악에 의해서도 잘 동요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다(엄주정, 1997). 즉, 그 결과는 곧 不動心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태권도의 수련과정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동작들 중에서 부동에서 출발하는 자세는 대단히 많으며 그 동작 자체의 수련만으로도 忠의 근원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태권도 수련의 과정에서 태극기에 대한 예나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경우 또는 해외 사범들이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해당 국가의 국기를 게양하여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즉,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 것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태권도 수련 과정에서 사범에 대한 예나 상급자에 대한 예 등은 孝의 발로로서 忠의 시작이요 존경심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태권도는 역학적 원리로서 직선 운동과 회전 운동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태권도 수련에서의 직선 운동은 인간사의 곧은 의지로 표현되며 이것이 忠과 孝의 기저를 이루는 동작이라고 할 수 있다.

忠孝의 실천은 개인의 이익보다 조직과 규율을 통하여 대아를 희생할 수 있는 정신력 배양에 치중한 교육 때문이기도 하지만 삶의 기본을 전체적인 큰 하나로 둔다는 「한」사상에 뿌리를 박고 있는 우리 조상들의 윤리관 때문인 것으로 볼 때 이러한 정신을 배양해주는 태권도는 우리 민족의 참된 정신 문화라고 할 수 있다.

4. 예의 정신

예(禮)는 천지의 질서이다.
질서가 있으므로 만물에 모두 구별이 있게 된다. 예는 형식적인 예법에 앞서 자연의 질서를 이루고 있는 원리 또는 원칙을 뜻한다.
우주에는 천지의 질서를 이루는 원칙이 있고 인간 사회에는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 나아가는 원칙이 있다.

예의 정신은 인간 관계 가운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정신, 즉 겸양지덕(謙讓之德)으로 표현된다. 이와 같이 예의 본질은 구별에 있고 예란 일종 사회적 제약으로 사회 가치관을 유지하는 동인이 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예절이 바른 나라 즉, 東方禮儀之國으로 불려져 왔다. 우리의 조상들은 우주와 인간의 사회에는 따라야 할 하나의 큰 원리가 있다고 보고 그 원리를 존중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민족이 가진 위대한 道德原理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덕원리는 누구도 어길 수 없는 것이며, 이 원리를 어기는 경우 국가와 사회가 멸망한다고 생각할 만큼 도덕적 원리로서 예의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공자의「예기(禮記)」<중니연거편>을 보면 '예란 모든 것을 다스려 질서 있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예는 우리 「한」민족의 전통적인 유교 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교에서 예란 인간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명 행위의 규범으로 간주되고 있다. 유교에서 예의 본질로 간주되는 것은 어짐(仁), 의로움(義), 공경(敬), 충실함(忠), 믿음(信)과 같은 일종의 유교적 덕목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부모, 교사, 친구, 이웃 등을 대할 때에 가져야 할 태도와 마음의 자세, 그리고 그 이외의 사람들과 만났을 때에 대하는 행동방식과 관련된 것이 생활예절의 문제이다. 생활예절은 그 사람의 교양을 나타내고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며, 질서 있는 사회생활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생활예절은 가정이나 학교에서 배우지만 사회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신체활동과 더불어 예절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태권도장이다. 아마도 자녀를 태권도장에 보내는 대다수의 부모들 중에는 이러한 태권도장의 가치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태권도에서는 예의 전통적인 실천으로 겸양과 화목 그리고 질서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 태권도를 포함한 모든 무예에서는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난다(禮始禮終)'는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예를 중요하게 여긴다.
모든 무도에서의 특성에서도 나타나듯이 태권도에서도 존경심의 발로로서 사제지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예의, 도장에서 띠의 차이 즉 수련기간에 따른 상급자와 하급자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예의정신은 대단히 중요한 관점으로 교육되고 있다.
태권도에서 수련의 시작과 끝에는 경례가 있는데 예는 경례의 준말이다. 따라서 예를 실천할 때 몸가짐이 단정해야 하며 상대를 마음으로부터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태권도인이 수련할 때 도복을 단정히 여미고 띠를 바로 매는 등의 몸가짐은 마음을 닦으며 예를 실천하는 행위이다. 예의 지키는 일은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 것이며 결국은 자신의 품위를 지키는 길이다.

태권도는 예로부터 엄격한 예의와 선후배 사이에 규율성 곧 질서가 보이지 않는 규범으로 전통화 되어 있다. 이러한 윤리적인 덕목이 동양 무예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대한태권도협회에서는 태권도인이 도장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지켜야 할 구체적인 예의 규범을 1971년 5월에 제정하였다.
예의 표현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태권도에서 예법은 선 자세 곧 서서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 지켜야 할 규범으로는
첫째, 상하를 불문하고 공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행한다.
둘째, 예의 실천은 몸가짐이 단정하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셋째, 예의 표현은 상체를 15도 정도 굽혀 정중히 절한다.

예법으로 태권도인은 우선 도장을 출입할 때 예를 나타낸다. 도장은 기술을 습득하며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도의 장소로 완전한 인간의 형성이라는 교육적 가치를 실천하는 실천 공간이기 때문에 항상 감사의 예를 나타낸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예의 표현은 경의와 복종심, 신뢰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마음가짐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선후배와 동료간에도 존경과 신뢰로서 예를 표현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 수양의 실천이다. 또한 경기나 연습을 할 때 상대방을 자신의 훌륭한 교육적 대상으로 여기며 예를 나타낸다.

협동정신, 책임감, 준법정신 등도 예의정신에서 긴요하게 요청된다. 우리의 한민족 사회에서 사회발전을 위하여 예의정신이 요청되었던 것을 고려할 때 예의정신은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하는 협동정신이나 자기가 맡은 역할을 자기 스스로 해내려고 하는 책임감 그리고 규범과 원칙을 지켜 나아가는 준법정신은 태권도의 예의정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5. 부동심

무도에는 종교에서와 같이 부동심(不動心)이란 용어가 있다. 부동심이란 검도에서의 부동지(不動智)와 같은 말로 본래 「한」사상과 융합된 불교에서 나온 말이다.

승려 택암(澤庵)이 선학상(禪學上)의 견지로부터 검도를 논한 서적인 <不動智神妙錄>에 부동지(不動智)라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劍法과 心法과의 관계를 상세하게 논한 것으로서 검술이 발전하여 검도가 되고 술법이 심법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부동이란 본래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돌이나 나무처럼 장소에 고정된 것이 아니다. 수련이나 닦음의 세계가 아닌 단순한 지식의 세계에서 動이나 不動은 서로 받아들이지 않는 관념에 불과하지만 수련에 의해 자각된 지혜의 세계에서는 動卽不動, 不動卽動으로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것이다. 소위 내가 있는 곳이 언제나 주체가 되는 것으로 自主獨往之心이라고도 한다.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맥락에서 태권도 정신은 태권도 품새에 명칭으로 나타나 있는 고대의 고려나 우리 나라의 명산인 태백을 연상한다고 하여 육성되는 것이 아니라 태권도를 수련함으로써 획득이 가능한 정신이어야 할 것이다. 즉 태권도 수련을 통하여 태권도 정신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전제 속에 태권도 자체가 바로 태권 정신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스포츠로서의 태권도는 무도가 아닌 것 같다. 무도는 생과 사의 절실한 현장에서 배태된다. 그러나 스포츠에는 이 같은 절박성이 결여되어 있다. 죽음에 임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은 진정한 무도 수련에 의해서만 획득되어진다.

스포츠에서도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부동심이 길러질 수 있겠으나 무도에서 길러지는 부동심은 유희라는 일탈성에서 생긴 그것과는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태권도 수련 상황에서 나타나는 준비 자세 혹은 기마 자세를 통해 수련생들은 부동심을 저절로 체득될 수 있다.
기마 자세는 중심을 두 다리에 균등하게 하고 무릎을 약간 앞쪽으로 굽힌 자세로 양발은 서로 당기듯 하며 바로 선다. 이러한 자세는 물체로서의 몸의 움직임이 정지된 상태이나 기세가 발하기 직전에 끊임없이 움직여서 방어와 공격의 전 영역을 이해하는 부동지(不動智)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태권도를 수련하는 사람이 인식하든 못하든 관계없이 이미 이러한 태권도 수련의 동작 속에 내재하여 있는 것이다. 무도 정신이니 도니 하는 것이 태권도 밖의 어느 장소에 따로 있어 수련하는 사람이 그것을 따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권도 수련 자체에서 바로 태권도 정신이므로 그 정신을 알려면 태권도의 기본으로 되돌아가 그 본질을 파악하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먼저 선행되어 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맨손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고 나의 손으로 지르고, 치고, 찌르며 발로 차는 것이 태권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태권도의 道는 바로 이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즉 수련자의 주먹, 손, 팔, 발, 다리에 그 도는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태권도에서는 道니 精神이니 하는 것이 어디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태권도 수련하는 사람에게 이미 도가 함장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6. 극기 정신

자아실현을 위해 가장 먼저 논의될 관점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知己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강조한 것은 나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이며 나의 목표가 무엇이며 나의 의무와 책임이 무엇이고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로 알기 위해서 부단한 자기성찰과 자기 검토를 해야 한다. 우리는 남에 관해서는 많이 알고 관심이 많으면서 자기에 관해서는 너무도 모르고 있다.  즉, 克己의 전에 자기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克己란 내가 나 자신을 이기는 것이다. 인간은 두 개의 자기를 갖는다. 하나는 낮은 차원의 자기요 또 하나는 높은 차원의 자아이다. 전자는 바람직하지 못한 자아요 후자는 바람직한 자아이다.

인간의 마음은 두 자아의 끊임없는 싸움터이다. 즉 인간 최대의 승자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말했듯이 선한 자기와 악한 자기, 고결한 자기와 추잡한 자기, 용감한 자기와 비겁한 자기, 참된 자기와 거짓된 자기, 大我와 小我 두 개의 자아가 나의 존재 속에서 치열한 내적 투쟁의 상황 속에서 克己를 익히게 된다.

「한」의 정신에서와 같이 높은 차원의 자기는 대아요 낮은 차원의 자기는 소아인 것이다. 즉, 우리는 극기인이 되어야 한다. 지혜의 스승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老子는 "남을 이기는 것은 힘이 있는 것이요 자기를 이기는 것은 강한 것이다(勝人自力 自勝自强)"라고 말했다. 우리는 남을 이기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이겨야 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이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克己를 통한 자아의 실현은 내가 나를 갈고 닦는 修己의 과정을 거쳐 成己에 이르는 것이다.
인간은 대리석과 같은 것이다. 대리석에서 광채가 나려면 갈고 깍고 다듬는 것이 필요하다. 구슬도 닦아야 빛이 나고 玉도 갈아야 윤이 난다. 인간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惡戰苦鬪의 수련을 쌓아야만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다. 德은 바로 노력의 산물인 것이며, 인격은 공부의 산물인 것이다. 자기성장과 자기확충의 진지한 수련이 없이는 결코 큰 인물이 될 수가 없다. 구슬을 닦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玉不琢不成器 人不琢不知道). 즉, 부단히 자신을 갈고 닦고 다듬는 진지한 修己人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大器가 되고 德己를 만드는 근본인 것이다.
修己를 통해 成己에 이르게 되며, 成己는 바로 인간 최고의 善이다.  인간은 무한한 知와 德과 빛과 힘과 향기를 간직하는 고귀한 생명체이며, 저마다 최고의 자아를 완성하는 것이 인간의 신성한 의무요 최대의 보람이요 기쁨인 것이다.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율곡은 '誠'의 공부에 힘썼고 퇴계는 '敬'의 공부를 강조했고 島山은 '사랑하기' 공부를 실천했던 것이다. 즉, 인간은 극기를 바탕으로 자아실현의 길에 다다르는 것이다.

인내와 극기라는 말은 동의어처럼 활용하지만 인내는 고뇌하고 참아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극기는 그 인내의 단계를 넘어선 차원으로서 인내하여 극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태권도의 수련과정에서는 자아의 극기를 통해서만이 완성될 수 있는 많은 기술들이 무수히 많다. 또한 태권도의 기본 동작 중에는 부동 자세와도 많은 관련이 있으며, 그러한 동작들은 태권도의 무도적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태권도의 품새는「한」철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손과 발의 기술 체계인 서기, 막기, 지르기, 차기 등 공방(攻防)의 기법을 일정한 틀로 하여 구성된 학습 체계이다.  품새는 태권도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데 심신 수련을 통해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부단한 인내와 수련을 요구한다. 또한 품새의「한」철학 원리를 이해하고 수련하는 과정에서 심미적 예술성에 탐닉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품새는 심신의 조화로운 활동을 위한 철학적 행위 예술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태권도의 품새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동작들은 수 없이 많은 연습과정을 되풀이 함으로서 극기심을 배양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成己에 이르러 自我를 실현하게 된다.
즉, 주춤서기의 동작에서부터 태권도의 발차기 기술을 익히는 과정으로 공중에서 3∼4번을 찬다거나 540도를 회전해서 뒤후리기를 하는 동작에 이르기까지 그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인내하며 그 과정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이겨내는 극기의 정신이 함양되는 것이다.

체육·스포츠의 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태권도 수련의 현장에서는 체중 조절을 한다거나 잘못된 기술 동작을 수정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훈련을 하는 동안에 생리적이거나 심리적인 극한을 뛰어 넘을 수 있게 지도하거나 수련하는 것은 바로 극기 정신을 배양해준다.
따라서 태권도를 수련함으로써 생성되는 이러한 극기 정신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개척해주는 커다란 가치일 것이다.

7. 준법 정신

준법정신의 본질은 법률과 규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지켜서 생활하려고 하는 정신적 자세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주의 만물은 규칙에 따라서 움직여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봄이 오고 그 다음에 여름과 겨울 그리고 겨울이 오는 것처럼 자연현상에도 규칙이 있으며, 줄을 서서 자기의 차례를 지켜가면서 자동차를 타는 것과 같이 사회생활에도 또한 규칙이 있다. 우리의 사회생활은 규칙을 떠나서 한 순간도 유지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한 준법정신이 필요하게 된다. 준법정신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준법정신은 규칙을 지키려고 하는 정신적 자세이지만 그 배후에는 사회 전체의 안정적 발전을 달성하려고 하는 사회성과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것이다. 즉 준법정신은 협동의 원리와도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협동은 힘과 마음을 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책임의식을 수반하는 공동체 형성의 원리이다. 따라서 협동은 준법정신과 더불어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큰 활력인 것이다. 우리 민족이 공익우선의 협동심을 발휘하여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이익에 앞서 남과 더불어 살겠다는 공익정신에 투철한 「한」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일의 Andre Eckardt는 "나는 한국을 어떻게 보았나"라는 책에서 유럽 사람들은 흙일을 할 때 혼자서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한 사람이 가레를 잡고 두사람이 가레에 매어져 있는 끈을 제각기 잡아당겨 협동적으로 하는 것을 보고 협동심을 칭찬하였다.

한민족은 예로부터 이웃을 사귈 때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하고 있으니 이것은 너와 나의 분별을 두지 않는 대아정신을 바탕으로한 협동정신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협동정신은 사람의 행실을 믿음을 으뜸으로 한다(人之行 以言爲圭)는 신념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믿는 가운데서 발전하였고, 이러한 믿음은 법과 규칙을 잘 준수하는 준법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신들이 민족의 단결심을 고양시키고 새 역사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한민족의 전통무예인 태권도는 대인대전의 무술로서 개인이 개별 동작들을 수련하는 행위에서 시작되어 완숙한 동작을 행할 수 있게 되며 그로 인해 인간 완성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태권도의 수련행위로 활용되어 온 품새는 각각의 개별 동작들에 의한 복합동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품새는 전체의 동작을 구성하는 구조적 규칙성을 지니며 수련생들은 그 규칙의 범주 안에서 반복적인 수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준법정신은 그러한 품새 수련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다.
품새의 수련에서 뿐만아니라 약속겨루기나 자유 겨루기시 상대에게 해서는 안될 규칙 준수의 행위가 사회로 전이되었을 때 사회에서의 준법정신을 함양해주는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품새는 태권도 수련 과정의 주된 학습 과제이며 일선 도장이나 국기원에서 승단 심사를 할 때 학습 평가 기준에서 60%를 차지하고 있어 심사관의 판정에 승복하는 자세와 겨루기를 할 때 규칙을 지키고 심판의 판정에 승복하는 자세는 사회에서의 준법정신을 고양시켜 준다.

태권도 수련에 의해 단련된 주먹이나 발기술 등을 사회에서 선의의 사용을 하면 정의나 의협이고 상대를 공격하거나 파괴에 활용하면 그것은 무기화 되어 법에 위배된 반사회적 행동으로 표출되게 된다. 따라서 태권도 수련의 과정에서는 이러한 선의의 정신을 강조하며 예의 정신과 함께 병행하여 교육되어 왔으며, 개체와 환경과의 급조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자제력으로 이를 극복하는 극기정신과도 준법정신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8. 호연지기(浩然之氣)

중국의 '의화단' 사건은 일본에 대항하여 중국 무술인들이 규합함으로써 발생된 사건으로서 일본인들은 그 이후로 중국의 무술 보급을 차단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은 그 영향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문화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우리의 무술 확산을 방해하였다. 그것은 무도인의 곧은 의지 즉, 호연지기의 정신적 자세를 두려워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호연지기(浩然之氣)란 사전적 의미로 '공명정대하여 어떤 사람을 대하여도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적 용기', '사물에서 해방되어 자유스럽고 유쾌한 마음' 또는 '널리 천지간(天地間)에 유통하는 정대한 원기 또는 사람의 마음에 차있는 정대한 기운'을 뜻하고 있다.

예로부터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무인의 강직함과 공명정대함을 논증해주고 있다. 그러한 강직함과 공명정대함은 무인으로서 한 개인의 특성일 수도 있지만 무(武)를 통해 체득되는 정신 즉 호연지기의 정신일 것이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 무예인 태권도 역시 호연지기를 고양할 수 있는 신체수련의 동작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철학의 신체론적 견지에서 태권도의 동작은 동작의 정지 상태인 ○·□·△의 품에서 살아 움직이는 동적인 동작인 '·', 'ㅡ', 'ㅣ'로 변화하는 과정으로서 태권도의 수련 상황에서의 역학적 동작들은 주로 직선운동과 회전운동의 복합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태권도의 기본 동작 중 주먹지르기와 발차기 기술 등의 직선 운동은 忠孝精神과 더불어 세상을 올바로 살아가는 곧은 마음이나 기운, 즉 공명정대한 용기를 고양해준다.
또한, 태권도 수련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호신능력을 갖추게 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태권도의 반복된 수련을 통하여 자신 스스로의 동기를 유발하고, 극기로 인해 체득하게 되는 자신감은 어떠한 상대를 대할 때에도 두렵거나 부끄러움이 없는 용기, 즉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공명정대한 자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충분한 연습을 하게 되면 태권도 겨루기시 상대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고. 겨루기 전에 상대를 제압할 만한 용기, 즉 담력을 갖추고 정대한 기운을 표출함으로써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게 되는 것이다.

태권도 수련은 사회에서의 어떠한 환경에도, 어떤 사람을 대할 때에도 당당히 대응할 수 있는 호연지기의 정신을 고양시킨다.

Ⅵ. 요약 및 결론

우리의 태권도가 무도와 스포츠로서 세계 150여개국에 약 5천만명의 수련생을 보유하고 세계인의 태권도로 성장하였다는 것은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태권도를 통한 신체적인 성장 발달의 가치는 가시적으로 표출될 수 있으나 태권도의 정신적 가치는 인간의 내면적 가치로서 형이상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불가시적인 태권도 정신을 몇 개의 고정적 개념으로 정의내린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 세계를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와 같이 어리석은 발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구자는 태권도 교육 현장의 요구에 부응하여 태권도 정신이 다른 무술 사상과 구별되는 개성 즉 독자성을 지니고 있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태권도 수련 행위의 본질에 근거를 두고 태권도 정신을 항목별로 세분하여 정리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태권도 수련의 결과로 인해 생성되는 태권도 정신은 우리 전통의「한」철학 사상을 근간으로 평화 정신, 애국 정신, 충효 정신, 예의 정신, 부동심, 극기정신, 준법 정신, 호연지기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평화 정신

평화 정신은 분열, 대립, 이성(二性)을 허용치 않는 「한」의 정신에서 연유한 것으로 태권도 도복이나 수련의 상황이 평화를 상징한다. 본래 우주의 본체가 흰색이고 만물의 근원 또한 흰색으로 보아 태권도의 도복 그 자체는 평화의 상징인 것이다.

2. 애국 정신

태권도 수련의 단계에서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에 대한 맹세나 예(禮)를 통해서 애국 정신이 자연스럽게 함양된다. 태권도를 통해 함양되는 태극기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민족과 국가를 위한 애국 정신의 바탕이며 민족일체감 형성의 정서적 기반이 되며, 온 겨레로 하여금 화합하고 결속하는 협동 정신의 발로가 된다.

3. 충효 정신

태권도 수련의 과정에서 태극기에 대한 예나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경우 또는 태권도 수련 과정에서 사범에 대한 예나 상급자에 대한 예 등은 孝의 발로로서 忠의 시작이요 존경심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태권도는 역학적 원리로서 직선 운동과 회전 운동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태권도 수련에서의 직선 운동은 인간사의 곧은 의지로 표현되며 이것이 忠과 孝의 기저를 이루는 동작이라고 할 수 있다.

4. 예의 정신

태권도에서는 예의 전통적인 실천으로 겸양과 화목 그리고 질서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 태권도를 포함한 모든 무예에서는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난다(禮始禮終)'는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예를 중요하게 여긴다. 모든 무도에서의 특성에서도 나타나듯이 태권도에서도 존경심의 발로로서 사제지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예의, 도장에서 띠의 차이 즉 수련기간에 따른 상급자와 하급자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예의정신은 대단히 중요한 관점으로 교육되고 있다.
협동정신, 책임감, 준법정신 등도 예의정신에서 긴요하게 요청된다. 우리의 한민족 사회에서 사회발전을 위하여 예의정신이 요청되었던 것을 고려할 때 예의정신은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하는 협동정신이나 자기가 맡은 역할을 자기 스스로 해내려고 하는 책임감 그리고 규범과 원칙을 지켜 나아가는 준법정신은 태권도의 예의정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5. 부동심

태권도 수련 상황에서 나타나는 준비 자세 혹은 기마 자세를 통해 수련생들은 부동심을 저절로 체득될 수 있다. 기마 자세는 중심을 두 다리에 균등하게 하고 무릎을 약간 앞쪽으로 굽힌 자세로 양발은 서로 당기듯 하며 바로 선다. 이러한 자세는 물체로서의 몸의 움직임이 정지된 상태이나 기세가 발하기 직전에 끊임없이 움직여서 방어와 공격의 전 영역을 이해하는 부동지(不動智)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태권도를 수련하는 사람이 인식하든 못하든 관계없이 이미 이러한 태권도 수련의 동작 속에 내재하여 있는 것이다. 무도 정신이니 도니 하는 것이 태권도 밖의 어느 장소에 따로 있어 수련하는 사람이 그것을 따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태권도에서는 道니 精神이니 하는 것이 어디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태권도 수련하는 사람에게 이미 도가 함장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 극기 정신

태권도의 수련과정에서는 자아의 극기를 통해서만이 완성될 수 있는 많은 기술들이 무수히 많다. 또한 태권도의 기본 동작 중에는 부동 자세와도 많은 관련이 있으며, 그러한 동작들은 태권도의 무도적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태권도의 품새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동작들은 수 없이 많은 연습과정을 되풀이함으로서 극기심을 배양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成己에 이르러 自我를 실현하게 된다. 즉, 주춤서기의 동작에서부터 태권도의 발차기 기술을 익히는 과정으로 공중에서 3∼4번을 찬다거나 540도를 회전해서 뒤후리기를 하는 동작에 이르기까지 그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인내하며 그 과정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이겨내는 극기의 정신이 함양되는 것이다.

체육·스포츠의 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태권도 수련의 현장에서는 체중 조절을 한다거나 잘못된 기술 동작을 수정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훈련을 하는 동안에 생리적이거나 심리적인 극한을 뛰어 넘을 수 있게 지도하거나 수련하는 것은 바로 극기 정신을 배양해준다.

7. 준법 정신

품새는 전체의 동작을 구성하는 구조적 규칙성을 지니며 수련생들은 그 규칙의 범주 안에서 반복적인 수련을 하게 된다. 준법정신은 그러한 품새 수련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다.
품새의 수련에서 뿐만아니라 약속겨루기나 자유 겨루기시 상대에게 해서는 안될 규칙 준수의 행위가 사회로 전이되었을 때 사회에서의 준법정신을 함양해주는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태권도 수련 과정에서 심사관의 판정에 승복하는 자세와 겨루기를 할 때 규칙을 지키고 심판의 판정에 승복하는 자세는 사회에서의 준법정신을 고양시켜 준다.
태권도 수련에 의해 단련된 주먹이나 발기술 등을 사회에서 선의의 사용을 하면 정의나 의협이고 상대를 공격하거나 파괴에 활용하면 그것은 무기화 되어 법에 위배된 반사회적 행동으로 표출되게 된다. 따라서 태권도 수련의 과정에서는 이러한 선의의 정신을 강조하며 예의 정신과 함께 병행하여 교육되어 왔으며, 개체와 환경과의 급조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자제력으로 이를 극복하는 극기정신과도 준법정신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8. 호연지기(浩然之氣)

우리 나라의 대표적 무예인 태권도는 호연지기를 고양할 수 있는 신체수련의 동작들로 구성되어 있다. 태권도의 역학적 동작들은 주로 직선운동과 회전운동의 복합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태권도의 기본 동작 중 주먹지르기와 발차기 기술 등의 직선 운동은 세상을 올바로 살아가는 곧은 마음이나 기운, 즉 공명정대한 용기를 고양해준다.
또한, 태권도 수련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호신능력을 갖추게 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태권도의 반복된 수련을 통하여 자신 스스로의 동기를 유발하고, 극기로 인해 체득하게 되는 자신감은 어떠한 상대를 대할 때에도 두렵거나 부끄러움이 없는 용기, 즉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공명정대한 자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충분한 연습을 하게 되면 태권도 겨루기시 상대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고 겨루기 전에 상대를 제압할 만한 용기, 즉 담력을 갖추고 정대한 기운을 표출함으로써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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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hnsTaekwon 안용규 /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태권도의 정신적인 측면에 대하여 다양한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던 깊이 있는 글로써 태권도 지도자로써 많은 도움이 되는 글이다.
문단 나누기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나름의 입장에서 보기 편하게 나누었지만, 역시 제대로 나눠지지는 않았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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