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범일지

너는 인대를 다치고, 나는 마음을 다치고....

by 태권마루 2008. 3. 21.

나의 수업방식은 몸풀기 - 주운동 - 보조운동 순으로 진행된다. 계획표에 따라 충실히 수업을 진행하지만 가끔은 날씨, 아이들의 컨디션, 주변 여건에 따라 수업 내용을 변경할 때도 있다.

가끔은 수업 시간(1시간)이 끝나기 전에 수업 내용을 끝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는 간단한 게임으로 아이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준다.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준비된 일종의 게임이 몇 가지 있는데 어제는 닭싸움을 했었다.

보통은 학년별로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끼리 경쟁을 시키는데 종일 그렇게 하다가 초등 마지막 부(4부)에는 여학생들이 유독 많아 좀 색다르게 여성팀 vs 남성팀으로 진행해봤다.

당연히 학년이나 덩치를 고려하여 상대를 붙였는데, 평소 남학생보다 힘이나 덩치가 월등한 여학생 L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고통스러워했다. 여기서 나의 실수가 시작되었다.

닭싸움을 하다 보면 당연히 지는 사람은 넘어지고, 또 부딪히는 운동이다 보니 부딪혀서 고통스러워하는 일이 다반사기 때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왜 그러니?" 하면서 대략 살펴보고는 특별한 조치도 없이 저 옆으로 가서 앉아 있으라고 했다.
곧 수업이 마칠 예정이었고, 무엇보다 L이 평소에 관심을 받기 위한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꾀병이라고 섣불리 판단해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해버렸다.
저쪽에 가서 앉으라고 하니 한쪽 발을 아예 내딛지도 못했는데 꾀병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L의 그런 행동들조차 믿음이 가지 않았고, 오히려 짜증까지 밀려왔다.

아무튼 남은 게임을 진행하고 아이들을 해산시키고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 다시 한번 살펴보고는 바르는 파스를 발라주었다. 테이핑으로 고정해주려고 했는데 하필 반창고도 다 떨어져서 모자라는 바람에 반쯤 해주다 떼어버렸다.
좀 더 살펴보기 위해 이래저래 건드려 보는데 일부러 이러는 거라는 생각을 하니 계속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서 이렇게 발을 내딛지도 못할 정도라면 뼈가 부러졌을 것이니 당장 병원에 가야 할 것이라고 겁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좀 괜찮아졌다고 하는데 그 소리를 듣고 나니 의혹은 더욱 커졌고 아이의 움직임을 살펴보니 다친 발의 뒤꿈치를 땅에 대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앞축을 대기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쪽 대다가 저쪽 대다가 하는 모습을 보고 거짓이라는 확신까지 서버리는 순간이었다.

밤 9시가 무렵이었으니 큰 병원이 아니면 문을 연 곳도 없을 테고, (스포츠) 테이프는 살 곳도 없고 무엇보다 꾀병이라고 생각하니 더는 어떻게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발목 삐는 일이야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고 보통 며칠 쉬면 잘 나으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큰 병원이 그리 멀지는 않으나 다음 부 수업도 생각하니 그냥 집에 보내고 싶었다.

지금껏 이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 아이의 행동이 꾀병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 모든 하지 말아야 할 생각과 변명이 밀려들었다.

아무튼, 그래도 그냥 보내면 집에서 전화 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집에 아버님이 계시다길래 전화를 걸었다.

"L이 발목을 다쳤는데요 걱정하실까 봐 미리 전화드립니다. 발을 잘 딛지도 못하니까 일단 얼음찜질을 해주시고, 내일도 그렇게 아프다면 병원에 데려가서 뼈에 이상이 없나 X-Ray 찍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이 대번에 화난 말투로 그래서 그냥 보내는 것이냐며 조치는 어떻게 했냐고 따져 물어왔다. 순간 당황했다. (스포츠) 테이프가 없어서 고정도 못 시켰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었고,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 말이다. 대다수 부모님은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응답해오기 때문에 화를 내는 목소리를 듣고 당황해서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버벅거렸다.

내가 미쳤는지 화내는 부모님에게 오히려 짜증 섞인 말투로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았다. 전화를 끊고 아이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있는데 L의 아버님이 차를 몰고 나왔다. 병원에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왜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을까?'

그렇게 도장으로 돌아온 후 마지막 부 수업을 진행했지만, 나의 행동을 계속해서 돌이켜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왜 그랬을까?'

수업을 모두 마치고 L에게 전화했다. 어떻게 됐냐고 물었더니 인대가 늘어나서 깁스를 했단다.

어머님을 바꿔 달라고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어머님의 원망 가득한 음성이 그대로 전해왔다. L은 3일 뒤에 수학여행이 있고, 곧 승품·단 심사를 앞두고 있는데, 누구와 부딪히지도 않고 혼자서 뛰다가 다친 것이지만 지도자의 책임이 있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조치를 하지 않았으니 모든 원망을 내가 뒤집어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 너무 화가 난다. 내가 오늘 뭐에 쓰였는지 지금껏 하지 않던 행동으로 크게 신뢰를 잃었다. L은 평소에 나를 잘 따르며 운동도 열심히 했었는데 선입견 때문에 사실을 왜곡시켜 바라보고 행동하여 L과 그 부모님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나 자신에조차 큰 상처를 남겼다.

가뜩이나 요즘 수련생도 주는 마당에 또 하나의 수련생을 잃을 지경이고, 무엇보다 한순간의 감정 섞인 판단 미스로 수련생 하나 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은 나 자신이 부끄럽고 원망스럽다.

아이들은 순수하면서도 교활하다. 더욱이 L과 같이 6학년 여학생이면 사춘기에 접어들어 그 교활함의 정도가 매우 정교한데, 나는 그런 선입견으로 인해 스스로 속아버린 것이다. 후회해봐야 변할 것은 없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수련생의 작은 부상이라도 최선을 다해 돌보겠다는 다짐을 하며, 나와 같이 감정 조절에 실패하여 실수를 연발하게 될 많은 초보 사범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아이들을 바라볼 때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바라볼 것, 수련생이 만약 부상을 당한다면 아무리 미약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최선을 다해 조치한 다음 학부모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도장 차량이 전복되어 아이들이 사망하고 다쳤던 사고가 떠오른다. 사고의 정도는 다르지만, 부모들의 마음이야 어찌 그 정도가 다르겠는가.. 부모의 입장에서 모든 일을 풀어나가고자 한다면 좀 미숙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신뢰를 잃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짧은 생각과 행동이 여러 사람의 하루와 내일까지도 망쳐버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