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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컬럼

건강의 목적에 대한 철학적 소고

by 태권마루 2008.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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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건강하게 살기를 바란다. 인간사를 통틀어 어느 시대고 건강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조선시대의 이황 선생도,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도, 고대 로마의 유베나리스(Juvenal)도 건강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건강에 그토록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갈까?

우리가 건강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건강을 가치로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팔에 정맥주사바늘을 꽂고 병원침상에 누워 신음하고 있는 환자 한사람을 상상해 보자. 그는 기력이 너무 쇠약해서 걷는 것은 고사하고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을 수조차 없다. 따라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도 없고, 친구를 만나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 또한 그토록 즐겨하던 테니스게임을 할 수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이제 이 사람에게 질문해 보라. "다시 건강해지고 싶지요?" 그의 대답이 "예!"일 것임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질문을 던져 보자. "왜 다시 건강해지고 싶지요?" 병원 침대에서 바라 본 바깥 광경은 그야말로 유혹 그 자체이다. 따스한 햇살 아래 개나리와 진달래가 봄의 정취를 한껏 더해주고 있고, 저 멀리 강 한가운데로 유람선이 떠가고 있다. 고수부지에 마련된 산책로에는 화사한 봄옷차림의 사람들이 이리 저리 거닐거나, 운동복장을 하고 뛰기에 열중이다. 고개를 돌리니 입원실 문을 통해 방문객들의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감으니 지난주에 친구들과 벌인 테니스경기에서 자신의 특기인 짧고 강한 백핸드로 결승점을 따냈던 순간이 떠오른다.

왜 다시 건강해지길 바라냐고? 이 물음은 결코 진정한 의미의 물음이 될 수 없다. 왜? 묻지 않아도 답변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가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을 수 있길 바라며, 따스한 봄볕을 맞으며 고수부지 산책로를 거닐고 싶어하고, 나무벤치에 앉아 지난주에 읽던 책을 마져 읽거나 사람들과 즐겁게 담소하길 소망하고 있고, 다시 전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테니스게임을 즐기고 싶음은 구태여 캐묻지 않아도 너무나 자명할 것이다. 그가 다시 건강해지고 싶어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실제로 이룰 수 있기 위해서인 것이다.

1. 우리가 건강해지고 싶어하는 이유

요즘 들어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건강을 위해서 금전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고, 건강관련 업종이 크게 번창하고 있다. 각종 건강보조식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며, 황수관의 "신바람 건강법"은 몇 달 째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다. 신문을 비롯한 각종 대중매체는 아침저녁으로 고정 칼럼과 특집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건강에 대한 각종 정보를 쉴새 없이 제공해주고 있으며, 장면과 장면, 지면과 지면 사이에 대중의 건강욕구를 자극하는 광고를 쉴새없이 내보내고 있다.

최근 사회체육이다 생활체육이다 하여 체육 및 스포츠 영역이 호경기를 맞고 있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건강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추측은 얼마 전 한 정부기관에서 발표한 통계자료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체육 및 스포츠 활동에 규칙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운동을 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건강 유지 및 증진"이다(문화체육부, 1997, 72).

우리들은 모두 건강하게 살기를 바란다. 우리 가운데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이는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건강에 대한 바램은 우리시대 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오랜 소망이었다. 인간사를 통틀어 어느 시대고 건강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조선시대에 살았던 퇴계 이황선생은 잘 알려진 유학자이다. 그러나 이황선생이 오직 유학의 연구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건강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활인심방(活人心方)"이라는 건강 유지 및 향상을 위한 체조서를 직접 저술하기도 하였다(장기권역, 1973).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Politica"에서 건강의 윤리적 가치를 언급한 바 있고(Meinberg, 1991, 44-45),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나리스(Juvenal)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게 하소서(orandum est ut sit mens sana in corpore sano)"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도 하였다(Knoche, 1950, 103-104). 이와 같이 건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관심사에 속한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건강에 그토록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갈까? 어떤 이유에서 건강을 위해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할까?

우리가 건강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건강을 가치로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은 분명 가치롭다. 아니 하나의 가치이다. 가치란 자고로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이끄는 속성을 지니며,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행위도 서슴지 않고 하기 때문에 건강을 하나의 가치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건강의 가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건강은 어떤 이유에서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으며, 우리의 행위를 유도할까? 이 물음은 매우 어리석고 쓸데없는 물음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우리들은 대부분 건강의 가치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물음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다.

이 글의 부제는 분명 "철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칸트가 이미 천명하였듯이 철학(Philosophie)은 "철학함"(Philosophieren)이다. 그리고 "철학함"이란 무엇보다도 남들이 당연히 여기는 것, 그래서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며 행위라고 말할 수 있겠다(Kunzmann,Burkard, 1993, 11). 2+3이 5라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아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2+3이 왜 5냐고 묻지 않는다. 그저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일 뿐이다. 마치 건강의 가치를 누구나 자명하게 여기듯이. 그러나 모름지기 철학 하는 자라면 이와 같이 자명한 사실에 의문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철학 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남긴 위대한 사상들은 대개 이와 같이 자명한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는 철학적 태도로부터 탄생하였다. 한 예로 사과나무에서 익은 사과가 떨어지는 자명한 사실에 의문을 품었던 뉴우튼은 급기야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뉴우튼이 전문적인 철학자는 아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는 물리학자이다. 그러나 그가 견지했던 학문적 태도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철학자임에 틀림없다. 이 점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와 같이 철학을 자명한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는 태도며 행위로 이해할 때,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부제를 장식하고 있는 이 글에서 사람들이 모두 자명한 사실로 여기는 건강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한 질문이야말로 바로 철학함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제 당당한 태도로 다시 한 번 의문을 제기해 보자. 건강은 왜 가치로울까? 우리들은 왜 그토록 건강을 원하는 것일까?

팔에 정맥주사바늘을 꽂고 병원침상에 누워 신음하고 있는 환자 한사람을 상상해 보자. 그 환자는 기력이 너무 쇠약해서 걷는 것은 고사하고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을 수조차 없다. 따라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도 없고, 친구를 만나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 또한 그토록 즐겨하던 테니스게임을 할 수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이제 이 사람에게 물어 보자. "다시 건강해지고 싶지요?" 그의 대답이 "예!"일 것임은 일고의 여지도 없다. 다음 질문을 던져보자. "왜 다시 건강해지고 싶지요?"

병원 침대에서 바라 본 바깥 광경은 그야말로 유혹 그 자체이다. 막 가을이 시작되려는지 하늘은 유난히도 푸르고, 높다. 그리고 저 멀리 한강 한가운데로 유람선이 떠가고, 고수부지에 마련된 산책로에는 강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이 이리 저리 거닐거나, 운동복장을 하고 뛰기에 열중이다. 고개를 돌리니 입원실 문을 통해 방문객들의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감으니 지난주에 친구들과 벌인 테니스경기에서 자신의 특기인 짧고 강한 백핸드로 승점을 따냈던 순간이 떠오른다. 왜 다시 건강해지길 바라냐고? 이 물음은 결코 진정한 의미의 물음이 될 수 없다. 왜? 묻지 않아도 그 답변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 환자가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을 수 있길 바라며, 따스한 가을햇살을 받으며 고수부지 산책로를 거닐고 싶어하고, 낙엽 쌓인 벤치에 앉아 지난주에 읽던 책을 마저 읽거나 사람들과 즐겁게 담소하길 소망하고, 다시 전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테니스게임을 즐기고 싶음은 구태여 캐묻지 않아도 너무나 자명하다. 그가 다시 건강해지고 싶어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실제로 이룰 수 있기 위해서이다. 이제 우리가 왜 건강해지고 싶어하는지, 왜 건강을 가치롭게 여기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졌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에 하나 아직 그 이유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은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서 보다 일반화시켜 다시 한번 설명하겠다.

우리는 모두 성취하고 싶은 목표를 갖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예술가로서 아름다운 예술품을 창작하고 싶어 할 수도 있겠고, 운동선수로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하고 싶은 욕구를 가질 수도 있겠으며, 소설가로서 도스트옙스키처럼 불후의 명작을 쓰고 싶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혹자는 정치가로서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고 싶어 할 수도 있겠고, 학자로서 훌륭한 연구업적을 많이 남기는 꿈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서 온갖 열정을 기울일 것이다. 작업실에서 침식을 잊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거나, 육체적 고통으로 쉬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묵묵히 인내하며 트랙을 달리거나, 또는 밤을 꼬박 새우며 습작 연습에 몰두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가득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기울일 수 없는 상황에 처 할 수가 있다. 건강을 상실했을 때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우리가 건강에 집착하고, 건강을 가치롭게 여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건강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우리의 자주적인 목표를 실현할 수 있기 위한 전제이며,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글의 서두에서 던진 물음은 완벽하게 대답되었다. 우리가 건강을 바라는 이유에 대한 그 이상의 답변은 불필요하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이 글을 끝마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 글을 끝마친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 "뭐 이렇게 싱거운 글이 다 있어?", 또는 "이거 독자를 우롱하는 거 아냐?"하면서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독자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도, 또 "철학적 소고"(哲學的 小考)"라는 제목의 위광(威光)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얼마간의 그럴듯한 부연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이하의 논의는 "우리는 우리의 바램을 실현할 수 있기 위해서 건강해지고 싶어한다"는 명제에 대한 부연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2. "우리가 건강해지고 싶어하는 이유"에 대한 부연설명

1) "인간적인" 삶의 의미

지금까지 "우리"라는 말이 지칭하는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은 채 그 말을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앞으로도 이 단어를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그 지칭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해 줄 필요가 있다. 분명하게 규정되지 않은 언어의 사용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필자와 이 글을 읽는 독자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류(類)의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로써 인간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다른 동물들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동물은 네 발로 걷지만 인간은 두 발로 걷는다. 이 대답이 옳을까? 그렇다면 새들도 두 발로 걷지 않는가?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하여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은 "새들은 털이 많지만 인간은 털이 적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인간을 '털이 없는 두 발 달린 동물'이라 정의한 소피스트들이 막 축하의 술잔을 들려고 하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한 철학자가 "여기 인간이 있소"하고 소리치면서 털을 뽑은 닭 한 마리를 휙 던졌다고 한다. 분명히 '털이 없는 두 발 달린 동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인간을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우화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신체적 차이에서 찾고자 했던 소피스트들의 시도가 무모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인간도 분명히 동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과 어떤 점이 다를까?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단지 살아갈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삶을 자주적(自主的)으로 영위하는 존재이다. 그저 살아가는 것과 삶을 영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수동적으로 이끌려 가는 삶이고, 후자는 능동적으로 이끌고 가는 삶이다. 인간을 제외하고 어떤 동물도 능동적으로 삶을 이끌고 가지 못한다. 그저 삶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갈 뿐이다. "동물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다만 종에 따라 미리 작곡되어 있는 행동의 멜로디를 연주할 따름이다"(허재윤역, 1993, 221). 배고프면 먹이를 찾아 헤매고, 졸리면 자고, 번식기가 되면 짝짓기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동물들은 자연적인 본능이 명령하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인간의 삶에도 이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물들과 달리 삶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서 능동적으로 이끌고 가는 면도 있다. 예컨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생리적 욕구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반응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후에, 그에 따라서 자주적으로 행위 하는 면도 있다. 따라서 본능의 명령에 위배되는 행위를 할 때도 종종 있다.

인간이 삶을 능동적으로 영위할 수 있음은 동시에 그가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이다.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 즉 자연적 본능에 의한 조종으로부터 - 자유'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무엇에로의 - 즉 창조적인 자기 규정에로의 - 자유'라는 의미에서이다"(허재윤역, 1993, 219).

쉘러는 본능의 조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에서 인간을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자"(Nein-sagen-könner)라고 표현하였다(Scheler, 1991, 55). 인간은 분명 본능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의 예는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굶주린 동물 가운데 음식물을 눈앞에 두고 단식할 수 있는 동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적인 자기 규정의 자유는 인류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매우 다양한 문명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가 곧 창조적인 자기 규정의 자유를 증명하는 징표이다. 개인의 삶을 살펴보아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늘 당사자 스스로가 결정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자신의 결단에 따라 학자로서 살아 갈 수도 있고, 정치가로서 살아 갈 수도 있으며, 예술가나 운동선수로서 살아 갈 수도 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말은 매우 심원하고,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해주는 특징인 것이다. 삶을 영위하는 능력, 즉 본능에 이끌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분명 인간의 특권이며, 조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살아가기보다는, 즉 수동적으로 이끌리며 살아가기보다는, 삶을 영위하기를, 즉 스스로 이끌어 가면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을 가치로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이란 무엇이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자기의식이 아직 충분하게 발달되지 못한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자주적으로 살아가도록 요청 받으며 성장한다.

2) 삶을 자주적으로 영위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건강

우리가 자주적으로 살아 갈 수 있으려면, 즉 자신의 의지와 뜻에 따라 살아 갈 수 있으려면 수 없이 많은 조건들이 갖추어져야만 한다. 이 조건들이 구비되지 않으면 자주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이 조건들 가운데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삶의 소여성(所與性)이다. 쉽게 말해서 생명(生命)이 주어져야 한다. 생명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다.

다음으로 구비되어야 할 조건은 성숙(成熟)이다. 인간은 단지 태어나는 것(생명의 소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삶을 자주적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는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성숙되어야만 한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아직 미숙한 어린이나 청소년으로부터 능동적이고, 자주적인 삶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을 성숙한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노력을 양육(養育)과 교육(敎育)이라고 부른다. 양육이 신체적 성숙을 돕기 위한 노력이라면, 교육은 정신적 성숙을 돕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양육과 교육을 통하여 신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각종 영양분을 공급받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각종 규범과 관습, 언어, 지식 등을 전수 받으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기른다.

생명의 소여(태어남)와 성숙은 인간이 갖추어야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최소한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건강 논의는 이미 이 두 가지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앞으로 이 두 가지 조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이 두 가지 기본 조건 이외에도 자주적으로 살 수 있기 위하여 요구되는 조건은 수 없이 많다. 이 조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조건 세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숨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산소가 적당히 포함된 대기를 필요로 하고, 얼어 죽어나 타죽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외부온도를 필요로 한다. 또한 신체를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기 위해서 적당한 중력상태를 필요로 한다. 이것들 이외에도 우리의 삶에 직접ㅗ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물리적 요인들은 수 없이 많다. 원활한 신진대사, 적절한 호르몬 분비, 적당량의 비타민 및 무기질 공급, 충분한 영양 섭취, 면역체계의 원활한 활동 등과 같은 물리(생리)적 요인들은 우리가 자주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다.

한편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삶의 목표를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다. 따라서 타인과 원만하게 상호 작용할 필요가 있다. 타인과 원만하게 상호작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을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하고, 남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언어와 각종 기호들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회적 조건에도 밀접하게 얽매여 있다. 사회적 조건은 한 순간이라도 미흡할 경우 생존에 치명적인 손상을 줄 수 있는 물리적 조건과는 달리 장기간의 삶의 연관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일정 기간 동안 사회적 조건을 무시한 채 외딴 섬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정기간 동안 만이다. 우리가 인간적인 삶을 바라는 한, 다시 말해 삶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하려고 노력하면서 살기를 바라는 한 사회적 조건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삶을 자주적으로 영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물리 및 사회적 조건 말고도 고려해야만할 다른 요인들이 있다. 그것은 심리적 조건이란 말로 포괄할 수 있는 요인들이다. 우리가 어떤 일이든 실제로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주의력과 기억력, 그리고 감성 및 지성 능력 등과 같은 심리적 조건을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 외에도 타인의 관심과 사랑, 자신을 인격체로써 인정해주는 타인의 태도, 가족, 친구 또는 동료들과의 감정적 교류, 자신감 등은 삶을 영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인들이다. 예컨대 우리는 최소한의 정도라도 자신감을 갖고 있어야만 능동적으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 자신감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아무런 시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 세 가지 요인들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듯이 갖추어져야 할 조건들 가운데 몇 가지 예이다. 이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지 않고서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하거니와 가능하더라도 매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이 조건들이 적절하게 갖추어질 수 있도록 매 순간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간다.

지금까지 자주적인 삶의 영위에 요구되는 조건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조건 세 부류로 나누어 설명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산만한 느낌을 준다. 이 조건들을 보다 단순화시켜 정리할 수는 없을까? 다행스럽게도 이 조건들을 총괄적으로 묶어주는 하나의 개념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조건이 삶을 영위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잘 갖추어진 상태를 지칭하는 용어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건강이다. 건강이란 바로 인간이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구비되어야 할 조건이며, 전제인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적인 삶"의 전제조건으로서 건강의 의미를 서술하였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이다. 즉 우리의 존재는 살아 있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삶' 또는 '살아 있음'은 인간적 현존(現存, Dasein)의 필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살아 있을지라도 건강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삶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즉 스스로 삶의 목표를 선택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면서 삶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강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은 자주적인 삶을 위한, 자주적인 현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며, 전제라고 말할 수 있다. 건강한 사람만이 자신이 바라는 바를 실제로 수행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다. 건강한 사람만이 자신의 의도와 계획을 자주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다. 그리고 건강한 사람만이 자신이 성취한 바를 누릴 수 있다. 건강할 때라야 비로소 우리의 삶은 주관적으로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가치로울 수 있다. 이 점을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건강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3. 자주적인 삶의 이율배반적 성격과 바람직한 삶의 태도

1) 자주적인 삶의 이율배반적 성격

나는 앞에서 철학적 인간학의 논변을 빌어 인간은 자신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삶을 자주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존재임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건강은 이렇게 살 수 있기 위하여 구비되어야만 할 중요한 전제조건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말을 보다 쉽게 표현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살수 있기 위해서는 건강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를 수 있다. 누가 우리의 건강은 돌보아 주어야 하는가? 건강을 유지하고, 상실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사회와 제도와 과학기술이 우리 건강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주변을 돌아보면 건강을 담당 의사나 병원, 또는 각종 건강 관련 업체에 위임하는 경향이 급격하게 늘고 있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건강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당사자인 개인에게로 돌아간다. 나의 건강은 내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 그리고 지킬 수 있다. 우리는 자주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다시 의문이 드는 점이 하나 있다. 건강이 우리의 삶에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면, 그리고 건강에 대한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부과되어 있다면, 우리는 왜 건강유지에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함으로써 건강의 문제를 단숨에 매듭짓지 못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평생동안 건강에 신경을 쓰며 살아야만 할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건강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데 필요한 우리의 지식이 미흡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그것을 알고 있을 지라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복잡다단한 현실 때문일 수도 있겠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건강관련 지식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부족해서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자주적인 삶이 갖는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완전히 절망했거나 자포자기한 사람과 같이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최소한 하나 이상의 목표, 모든 정력을 기울여서라도 성취하기를 원하는 하나 이상의 목표를 갖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목표는 우리가 살아갈 만한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독자들도 한 번 생각해 보라. 자신이 지금 어떤 목표를 갖고 살고 있는지. 만일 뚜렷한 목표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명이 앞으로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가정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그러면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남은 6개월을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비교적 명확하게 떠오를 것이다. 그 목표는 세계육상경기대회에 나가 신기록을 세우는 것일 수도 있고, 히말라야 정상을 정복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좋은 논문과 학술서적을 쓰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우리는 모두 최소한 하나 이상의 목표를 갖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올림픽경기에 참가하여 새로운 기록을 세우는 것일 경우 불철주야 운동연습에 몰두할 것이고, 히말라야 정상을 정복하는 것일 경우 땀을 흘리고 고생을 하면서 산을 오를 것이며, 좋은 논문과 학술서적을 쓰는 것일 경우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독서와 연구에 전념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삶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주야로 분투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자주적인 삶이며, 인간적인 삶이다.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은 동물처럼 본능적인 욕구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면서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불철주야로 노력하면서 자주적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반듯이 건강이란 조건이 구비되어야만 한다.

병원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처럼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바람, 자신의 삶의 목표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도 기울일 수 없다. 건강하지 못하면 불철주야 운동연습에 몰두할 수도 없고, 땀을 흘리고 고생을 하면서 산을 오를 수도 없으며,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독서와 연구에 전념할 수도 없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 즉 자주적으로 - 살 수 있기 위해서는 건강이란 조건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져야만 한다. 이렇게 자주적인 삶은 늘 건강을 조건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요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가능조건인 건강을 위협하고, 해치기도 한다.

오랜 시간 동안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새로운 프로그램을 구상한다던가, 억지로 잠을 줄이며 악보를 구상한다던가, 극심한 신체적 고통을 인내하며 산악구보를 한다던가, 무더운 여름날 더위를 참아가며 글을 쓴다던가 하는 등의 행위는 결코 본능에 따른 수동적 행동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의식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자주적인 행위이며,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과정이다. 이렇게 자주적인 행위로 인하여 자신의 눈이 피로해지고, 어깨와 허리근육이 뻣뻣해지며, 온몸에 피로가 누적되고,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결국에는 건강을 상실한다. 이렇게 자주적인 삶은 건강을 조건으로 요구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위협하고, 해치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의 자주적인 삶은 이율배반적 성격을 갖는다.

이율배반성은 인간의 삶이면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인류의 집단적인 삶의 방식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의 라이프스타일(lifestyle)에서도 찾아 볼 수 있고, 알콜중독자나 마약상습복용자 같이 예외적인 삶의 경우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에 애착을 갖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삶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학자, 교사, 예술가, 운동선수, 배우, 정치가, 등산가, 어느 경우에서든 자신이 선택한 일에 몰두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 때, 다시 말해 힘써 삶을 자주적으로 영위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이렇게 살 수 있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의 한계를 넘어선다. 다시 말해 건강을 상실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자주적인 삶은 우리 자신에 대한 영원한 도전이며, 위협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것이 연구활동을 목표로 하던, 예술활동을 목표로 하던, 아니면 스포츠활동을 목표로 하던 불문하고 우리의 자주적 삶은 삶의 주체인 우리 자신에 대한 도전이며, 위협이다. 건강이 우리의 삶에 그토록 큰 의미를 갖고 있음에도, 그리고 건강에 대한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부과되어 있음에도 우리가 건강 문제를 단숨에 매듭짓지 못하고 평생동안 그 문제로 고민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의 운명은 이와 같은 우리들의 삶이 갖는 이율배반적 성격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이카로스는 희랍의 건축가인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다이달로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명령을 받고 크레타섬에 미로의 궁전을 만들기 시작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미로의 궁전이 완성되지만 어이없게도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는 미노스왕에 의해 그 섬에 갇히게 된다. 미노스왕이 그 궁전의 비밀이 밖으로 새나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미노스왕에게 배신감을 느낀 다이달로스는 탈출을 계획하고, 결국 그 방도를 찾아낸다.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서 그 섬을 탈출하는 것이다. 완성된 밀납 날개에 몸을 의지하여 부자는 시칠리아를 향해 날아오른다. 그때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하늘을 날 수 있게 된 이카로스가 시칠리아로 향하는 대신 아름답게 빛나는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이달로스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근원에 대한 호기심을 억제할 수 없어서 이카로스는 날개짓을 멈추지 않는다. 이카로스가 태양 가까이에 이르게 되자 뜨거운 열이 밀랍의 날개를 녹여버린다. 날개를 잃은 이카로스는 결국 지중해로 추락하여 목숨을 잃게 된다(이왕주, 1997, 109-110).

근원에 대한 열정을 억제할 수 없어 태양을 향해 비상하는 이카로스와 같이 우리는 모두 자주적으로 설정한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분투 노력한다. 이카로스가 밀랍으로 만든 날개에 의지하여 태양을 향해 날아갔듯이 우리는 건강이란 날개에 의지하여 인생의 목표를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태양에 도달하고자 하는 이카로스의 비행이 자신의 전제조건인 밀랍날개를 파괴시켰듯이, 자주적으로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고자 분투 노력하는 우리의 인생은 자신의 전제조건인 건강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의 자주적인 삶은 이율배반적 성격을 지닌다.

2) 바람직한 삶의 태도

자주적인 삶의 이율배반적 성격에 직면하여 과연 우리는 어떤 태도를 견지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자주적인 삶을 포기하고, 무위무욕하며 삶에 우리 자신을 내맡겨 버릴 것인가? 우리 주변에는 건강과 장수를 강조하며, 금욕적 삶을 권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욕심을 버려라! 현재 주어진 상태에 만족하며 살아라! 노자(老子)의 가르침인 지지(知止)와 지족(知足)을 애써 실천하며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지지란 머무를 줄을 알라는 뜻이요, 지족이란 만족할 줄을 알라는 뜻이다. 이렇게 살면 분명 건강하게 살아 갈 수 있다. 장수무병하며 오래 오래 살 수 있다. 그러나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기 위해서 우리의 자주적인 목표, 우리의 인간적인 욕구를 모두 포기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삶의 태도일까?

나는 금욕주의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욕구가 없는 삶,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바램이 없는 삶을 과연 삶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 욕구와 바램은 발전의 원동력이다. 이 욕구와 바램이 없으면 발전이 없고 진보가 없다. 욕구와 바램이 없는 인간은 침체하고 퇴보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주야로 분투 노력하는 것이다. 목표가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다. 그것은 취생몽사(醉生夢死)요, 부허소일(浮虛消日)이다. 개인에게는 개인의 목표가 있고, 단체에는 단체의 목표가 있다. 산다는 것은 자기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면 건강을 삶의 목표로 삼으면 어떨까? 건강해지고 싶어하는 것도 분명 하나의 욕구요 바램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건강 자체를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간다면 아무런 문제없이 순탄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아니한가?

건강은 삶의 자족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 건강은 삶의 자족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조건일 뿐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다. 두 가지 예외적인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의사, 간호사, 운동처방사, 또는 보건복지부장관 등과 같이 건강을 직업적 목적으로 삼고 살아 가는 사람의 경우이다. 이 사람들은 직업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건강을 삶의 독자적인 목표로 삼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건강은 자신의 건강이 아니라 타인의 건강이다. 타인의 건강을 지켜주고, 회복시켜 주면서 이들은 삶의 의미를 찾고, 보람을 느낀다. 두 번째는 건강을 상실한 사람의 경우이다. 건강을 상실했을 때 가장 시급한 삶의 과제는 건강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 순간만큼은 건강이 삶의 목표가 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건강은 삶의 자족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

건강이 삶의 독자적인 목표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건강이 목적적 가치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건강 자체를 삶의 독립적인 목표로 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참된 의미에서 인간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말하기 어렵다. 인간적인 삶이란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이다. 여기서 자신이란 자신의 의도와 의지를 말한다. 건강을 목표로 하는 삶에서 자신은 객체로 하락한다. 건강이 목적이 되고 자신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자신의 삶의 목표가 오직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과 건강의 관계는 미인대회에서 당선한 미인과 미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미인대회에 입상한 미인들은 종종 자신의 삶의 목표가 오직 아름다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와 동일하게 건강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건강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에 건강은 인생의 주요 관심사가 되며, 삶의 모토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단순한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는 90세의 노인이 100세까지 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설정하는 것과 동일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단지 건강하게 사는 것, 단지 100세까지 사는 것이 목표인 삶을 과연 인간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돈의 철학"(Philosophie des Geldes)의 저자로 잘 알려진 짐멜(G.Simmel)은 우리의 삶을 두 면으로 분석한다. "우리 삶에는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보다 더 많은 삶(more-life)을 위해서 본능적, 충동적으로 노력하는 면이 있다. 이것은 자기 개인의 삶을 보다 더 오래 지속시키려는 노력에서뿐만 아니라 종족번식이라는 형태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또 한편 우리는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인간에게만 독특한 이성을 가지고 있어서 단순한 삶 이상의 것(more than life)을 창조해 가는 면도 가지고 있다"(한전숙,손동현,이정호, 1987, 3). 삶의 가치와 의미는 단순히 삶을 보다 오래 지속시키는데 있다기 보다는 삶 이상의 것을 이루어 가는 가운데 발견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90세를 100세로 연장하는 것이 목표인 삶은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삶일 뿐이지 의미 있고, 가치로운 삶은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건강은 결코 삶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일 뿐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다. 자주적으로 자신의 삶에 목표를 설정하고 과제를 부과하면서, 스스로 자신에게 도전하고 타인으로부터 도전 받도록 하면서, 또는 단순히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묵묵히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지루한 감이 있지만 강조하는 의미에서 한 번 더 말하면 건강이란 오직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좀 고상하게 말하면 인생을 아름답게 펼쳐나가기 위한 조건일 뿐이다.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얀 백지와 물감이 갖춰져야 하듯 우리의 인생도 의미 있기 위해서는 그 바탕이 되는 건강이 갖춰져야 한다. 그리고 미술에서 백지나 물감은 아름다운 그림을 창작해내기 위한 조건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듯이, 건강은 우리의 인생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하나의 필수적 조건일 뿐이지 그 자체가 독립적인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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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태권도협회 송형석 / 계명대학교 태권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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