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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일지

수년의 사범 생활 중 최고로 나태했던 날

by 태권마루 2009. 9. 17.

 

드디어 새로운 직함이 생겼다.

어제 하루는 내가 태권도 사범으로 일하면서 가장 나태했던 날이다. 미친 게 아닌가 싶다.
수업 내용은 발놀림 연습과 스트레칭으로 몸풀기를 하고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 체력측정을 한 다음 초급자들 집중 수업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날 태권도 모임에서 운동 강도가 높았고, 새벽에 집에 와서는 태권 자격증 신청서 작성한다고 꾸물거렸다. 자려고 누웠는데 TV에서 재밌는 영화가 하는 바람에 거기에 빠져 아침 6시는 넘어서야 잠들었다.

12시가 넘어서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1시가 넘어서 도장에 출근했다. 첫 부는 5명 안팎이 오기 때문에 안 그래도 기운 빠지는데 전날의 폐인 짓으로 말미암아 너무나도 피곤했다.
이전 같으면 정신력으로 버티며 충실히 수업했을 텐데 이제 보는 이 아무도 없기에 타락하고야 말았다.

전날 모임에서 발을 다쳐 제대로 걷기도 어려운 상태라 발놀림 연습은 건너뛰고, 스트레칭 가볍게 하고 곧바로 체력측정으로 들어갔다. 체력측정을 하기 전에 오늘 수업 태도가 좋으면 자유시간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위한 것인 줄 알겠지만 내가 쉬기 위한 포석이었을 뿐이다. 시간을 재며 아이들이 팔굽혀펴기할 때마다 개수를 세어주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지루해졌다.

잠이 쏟아지기에 밖에서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들어가 매트 위에 거의 반 누운 자세로 있었다. 1분 동안 시간을 측정해야 하는데 꾸벅꾸벅 조는 바람에 1분을 넘기는 경우도 생겨버렸다. 아이들 체력측정을 대충 마무리해놓고 자유시간을 주고 나는 구석에서 20~30분을 그렇게 잠들었다. 세 부를 그렇게 보냈다.
네 번째 부는 인원이 많아 체력측정만 하고 끝나버렸고, 마지막 부에서는 야구 하라고 시켜놓고 사무실에서 프린터 설치한다고 시간을 보내버렸다.

온종일 내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피곤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을 놓아버렸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보지 않는다 하여 이제 막장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
처음 사범 생활을 할 때는 수업을 시작하면 퇴근할 때까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단 1분도 앉지 않았는데, 이제는 드러눕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어제의 내 모습을 돌아보면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다. 혹여나 학부모가 보기라도 했으면 뭐라고 했을까? 처음으로 관장이라는 직함이 새겨진 띠를 매었는데 나는 그야말로 나태함의 극치를 달렸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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