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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건강

아이 뒤에 서기

by 태권마루 2007. 1. 19.

얼마 전 한 선배가 힘든 일을 겪었다. 말썽 한번 안 피우던 대학생 아들이 갑자기 자살을 한 것이다. 선배는 상당한 재산가인 데다 자녀들도 명문대를 다녀서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기에 더 충격이었다.

다른 친구는 딸 문제로 고민한다. 입시에 삼수한 외동딸의 수능 성적이 이번에도 나빠서다. 어릴 때 영재 소리까지 듣던 딸이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에 흥미를 잃고 지금에 이르자 친구는 딸의 앞날이 너무 두렵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안정된 가정에서 열성적으로 자녀 교육을 하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을 때가 적지 않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얼마 전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얻었다. 이혼재판에서 자주 나타나는 '부모의 과잉보호'가 그것이다. 중상류층의 이혼 사건 상당수는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란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몸만 어른일뿐 정신은 여전히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들의 결혼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과정부터 어머니가 주도한다. 결혼 생활의 사소한 갈등도 직접 해결하지 못해 시시콜콜 '엄마'와 의논한다.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신혼부부가 국제전화로 '엄마'의 훈수를 받으며 싸움을 한 사건도 보았다. 그러다 이혼 소송이 제기되면 결국 어머니들 싸움이 되고, 정작 당사자들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괜찮은 학력과 직장을 가졌지만, 독립된 삶을 살아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괴외를 받고, 10대가 되면 성적에 대한 압박이 더 강해져서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대학 선택도 어머니 몫이다. 의대 교수인 친구 말을 들어보면 학생 대신 그 부모가 학점에 대해 항의하는 일도 종종 있다고 한다.

사람은 각 성장 단계마다 해결해야 할 고유한 과업이 있다. 청소년기는 놀고, 실험해보고, 실패하면서 자신을 이해하고 정체성을 세우는 시기이다. 이를 위해서는 숨 쉴 공간과 자유가 필요한데 과잉보호하는 부모 아래에서는 정체성 문제로 씨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자기 정체성은 삶을 지탱해 주는 척추와 같은 요소다. 정체성이 약하면 주체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고 생명력이 시들어 삶의 어느 단계에서는 무너지기 쉽다. 급증하는 자살, 우울증, 약물중독 등은 외적인 사건 이전에 내적인 정체성 붕괴가 근본 원인이다. 과잉보호로 양육된 사람은 언젠가는 터질 시한폭탄과 같다.

독수리는 새끼가 자라면 강제로 둥지에서 밀어내 나는 훈련을 시킨다. 과잉보호하는 부모는 자식이 충분히 날 수 있는데도 계속 둥지에 두고 먹이를 갖다 먹여 주는 어미새와 같다고 할까. 이런 새끼는 다 커도 날지 못하는 바보새가 될 수밖에 없다.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열망이 오히려 아이의 정체성을 붕괴시키는 비극을 낳는 것이다.

사교육이 극성인 강남 지역에 전국 소아정신과 의원의 18%가 몰려 있는 데다 그곳에 환자가 넘쳐 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이를 꽁꽁 묶어 끌고 가면서 스스로 양육을 잘하고 있다고 믿는 부모들. 아이는 숨이 막혀 비명을 지르는데 그들은 듣지 못한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기도 전에 부모가 앞서서 끌고 가면 아이가 자기 생명과 힘을 확인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아이는 유약해지고 스스로 설 능력을 잃어버린다. 자녀를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강건한 사람으로 키우려면 부모는 반드시 그 뒤에 한 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아이가 혼자 모험하고 상처 입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되, 위험하거나 지치면 뒤에서 살며시 잡아 주는 것이 부모 역할이다. 상담학자 앤드류 레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마음속 깊이 있는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고, 자신을 수용할 수 있으며, 좋아할 수 있는 어른을 발견한다면 그는 진짜 보물을 찾은 것이다."

부모가 아니면 누가 아이의 '보물'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보물이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미친 듯 앞서 가는 세상 풍조를 거슬러, 부모 스스로 아이 뒤에 굳게 서 있기로 결심해야 한다. 지금 자신이 자녀의 어느 편에 서 있는지 곰곰히 살펴볼 일이다.

서울 고등법원 부장판사 윤재윤님 - <좋은생각>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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